일상사/아빠로살아가기

아픈 티

타츠루 2019. 6. 14. 09:31

병원 다녀오면서 아들이랑 슬러쉬를 처음 사먹음

 

아들은 어젯밤 내 옆에 와서 잠들었다.

오늘은 좀 늦게까지 잘 자고 일어났고, 이마에 밴드라도 붙이고 가라는 내 말에 '싫어~'하면서 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갔다. 나는 어제, "니가 이마 다친 것을 모르고 누가 장난으로라도 니 이마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표시'를 내기 위해 밴드를 붙이라고 했건만 그냥 갔다.

그러고 보니 '아픈 게 표나는' 사람을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힘들면 표가 잘 나는 사람, 아프면 겉으로 잘 드러나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맞을 때는 한 대 맞고 온 교실을 뛰어다니며 '의외의' 폭소를 만들어 줬던 친구가 생각난다. 같이 엎드려뻗쳐해 있어도 땀을 비지같이 흘리는 녀석이 부러웠다. 주변에서 보는 사람의 걱정을 자아내는. 좀 피곤하다 싶으면 입술이 터지는 동료도 있었다. 하, 그렇게 부러울 수가. 나는 일이 많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가 안 되는 정도인데, 이건 도대체 표가 나지 않는다. 갑자기 식사하던 자리에서 토하거나 하지 않고서야. 술을 마시면서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어렵고 싫은 술자리에서는 취하는 법이 없었다. 혹은 취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리를 파하고 일어 나면 핑 돌고는 했다.

내 삶의 영역을 다른 사람의 영역과 겹치며, 내가 하는 역할은 다른 사람과 맞물려 있다. 그러니 내 아픈 구석은 내 역할과 내 주변의 관계망에 영향을 끼친다. 내 아픈 구석을 몰라주면 섭섭할테니 차라리 그 아픔이 드러나면 좋겠다. 좀 과장해도 되지 않을까. 아프고 상처가 있다면 말하는 게 낫다. 내 아픔과 대치하느라 힘든데 누구도 내 아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수행하지 못하는 만큼의 내 역할의 부재는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말이 말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누구도 몰라주는 아픔도 아픔이 되기 어렵다. '나만 아는 아픔'이 있고 '나만 간직하고 싶은 아픔'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계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려면 내 아픔에 예민한 사람, 내 아픔을 들어주려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게 좋다. 모른다면 내가 좀 알려줘야 한다.

아들이 밴드를 안 하고 갔는데, 누가 옆에서 "너 이마 다쳤구나? 어쩌다가 그런거야?" 해줬으면 좋겠다. 아파트 상가 2층에 있는 피아노 학원으로 신나서 달려가다가 이마가 깨진 아들은 나를 보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러게 조심하라고 했잖아.'라고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니가 다치니까 아빠도 너무 속상해. 너도 속상하지.'라는 마음이 하마터면 '질책의 말'로 쏟아질 뻔했다. 아들을 안아주고, "많이 아팠겠다." 해줬다. 아들은 내 허리춤을 잡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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