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요즘 우리 딸이 자주 쓰는 말이다. 어제를 가리킬 때도, 저녁이 된 시간 아침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할 때도, 지난겨울 제주에 갔던 때를 가리킬 때도. 우리 아들은 아마도 ‘어제’라는 단어로 거의 모든 ‘예전의 시간’을 설명했던 것 같은데, 딸에게는 ‘예전에’라는 단어가 임팩트가 있었거나, 널리 쓰기 좋은 말로 들렸나 보다.
유치원에 다녀와서는 이런 말도 가능하다. “오늘 예전에 바나나 먹었어.” 우선 ‘오늘’이라는 시간은 지속되며, 공간적이고, 많은 활동과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예전에는 집에 오기 전, 유치원에 있을 때를 말하겠지. 그렇다면 더 정확하게 말하려면, 그냥 ‘오후 간식으로’라고 쓰면 되지만, ‘아까’라고 써도 된다. 딸의 저런 말을 바로 ‘예전에는 틀렸어, 아까라고 말해야지.’ 말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틀린 것이 아니라. 아직 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예전에’라는 개념이 대개의 성인이 가지고 있는 그것과 다를 뿐이다. 듣고 나서는 ‘무척 자연스럽게’ “아, 오늘 오후에 간식으로 바나나 먹었구나.” 말한다. 그럼 딸은 작은 말로 “어, 오후에.”라고 한다. 딸이 열심히 우리말을 배우고 있다. 실험하고, 재미있어한다. 부끄러워할 때도 있다. 잘하는 말이라도 어른들이 해보라 하면 아이들이 부끄러 하지 않는가? 어른들이 말하는 ‘잘한다’는 의미에서 아이들은 어쩌면 ‘내면의 확신’까지 발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인은 스스로 ‘잘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을 가진다. 겸손하려고 한번 사양하는 경우는 있어도, 스스로 ‘잘하는 일’에 대해서 아이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아직도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고, 세상 모든 것을 실험하고 있다. 그러니 아직 ‘확신’이나 ‘굳게 발을 디딜 평가의 기준, 행동의 기준’이 없는 것이다. 그런 불안의 상태 속에서도 아이들이 밝게 웃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 싶다.
아무튼 우리 딸은 잘 부르던 노래도, 웃으며 박수치며 다시 해보라고 하면 안 하겠다고 숨는다. 그 심정을 잘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정말 부끄러운 이유는 ‘잘하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직 부족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니 더 믿어주고 더 사랑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필요할까.
오늘 아침 곰국에 쇠고기 조각이 적다며 식판을 밀고 ‘싫어~’ 라고 말하는 딸을 훈육하기 시작한다. 밥을 안 먹고 유치원에 가야 할 수도 있다. 오빠가 학교에 가고 나면 밥을 치울 것이다. 물론, ‘고기가 없어서 못 준다. 먹고 싶으면 오늘 저녁에 고기 구워줄게.’라고 설명을 붙이긴 했다. 하지만, 딸은 어쩔 수 없지만, ‘원하는 마음’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나도 조금은 알겠다 요즘에는. 그렇다고 밥을 안 먹일 수는 없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밥은 먹어야 한다. 늦게 일어나 미적거리며 짜증을 내다가 비엔나 햄 하나만 먹고 유치원에 가본 적이 있는 딸은 ‘배고픈데 누가 먼저 먹을 걸 주지도 않는 상황’을 경험해 봤을게다. 그러기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딸이 좋아하는 열무김치국물을 꺼내어 알싸한 열무 한 줄기를 입에 넣어준다. 국물도 조금 떠 먹이며. “곰국 데워줄 테니까 밥 먹자.” 하니, 알겠단다. 그렇게 아침은 먹여냈다. 그리고 어제 사온 참외를 하나 깎아 먹이고 유치원 등원. 아이와 잘 지내려면, 어른도 얼른 ‘기분 나쁜 기분’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있다. 이건 상당히 연습이 필요하다. 40년 동안 살았지만, 그런 연습은 충분히 못 한 것 같다. 짜증 내다가도 갑자기 생글거리며 참외를 먹는 딸이 대단하다 싶다.
딸은 ‘예전에 아빠가 밥을 먹여주고, 토끼 머리도 해주고, 유치원 앞에서 안아주고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 줬다’는 것을 기억할까. 기억하면 좋겠다. 오늘 아침에는 길바닥에 민들레가 고개를 간신히 내밀고 있다. 한 송이 한 송이 찾으며 등원했다. 이 순간도 기억하면 좋겠다. 혹 기억 못 해도 좋다. 내가 지금 이렇게 기록하며 기억하고 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기억하면 된다. 나는 누구보다도 딸을 사랑한다. 딸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나중에 딸이 스스로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되며, 나는 2등으로 밀려난 자리에서도 열심히 사랑해야지.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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