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매트릭스
어제는 매트릭스를 봤다. 영화가 나온지 20년이 되었다고 해서. 영화를 보면서 나는 '배신자' 사이퍼에게 신경이 많이 쓰였다. 그리고 그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했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묻는다. "꿈이 너무 현실같고, 그 꿈에서 깨지 않는다면 그 꿈은 현실일까 아닐까?" 글쎄다. 꿈 속에서만 산다면 그 꿈이 '현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매트릭스 안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것은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매트릭스 안에서 나고 자란다면, 매트릭스가 주는 데로 인식하고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 매트릭스를 넘어설 수 있을까? 우리는 당장 우리가 가진 '한국어'라는 언어를 넘어서 인식할 수 있나? 통역기를 사용하면서, 외국어를 배우면서 '한국어'라는 문화매트릭스(이렇게 마음대로 지어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를 넘어설 수 있다. 인간이 아주 오랫동안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었다는 점도 그러하다. 우리는 '지구는 둥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지구가 둥근지를 알 수 있는 지를 배운다. 스스로 막대기를 들고 입증해보지는 않더라도. 누군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 인간에게 '우주에서 쳐다보는 지구'라는 인식이 가능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시 모피어스는 빨간약과 파란약을 보여주며 네오는 '용감하게도' 빨간약을 고른다. 그리고 '현실'을 체험하게 된다. 센티넬에게 쫓기며, 매일 생달걀 맛이 나는 죽을 먹는 삶. 네오는 그것을 참아내며 오라클로부터 '너는 '그'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자신의 선택을 이어서 간다. 자신의 선택을 향한 믿음이 네오를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보여주는 면모가 아닐까.
다시 사이퍼는 매트릭스로 돌아가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겠다고 한다. 우리가 가진 소망이라는 게 대개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는 게 아닌다. 물론, 모두 그렇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우선 '부자가 되고'부분에서는 '나도 그런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 부자가 되기 위해 내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집중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사이퍼의 소원을 곤궁을 벗어나 안락한 육체의 평화를 느끼며 살고 싶다고 바꾼다면 나는 어떻게 결정할지 어렵다. (그런 고민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참 다행. 이 현실이 매트릭스는 아닐테니. 하느님.)
아무튼 영화를 보는 내내 사이퍼의 고통이 질문을 던졌다. 모피어스는 누구에게 '빨간약'을 권할지 고심했을테지만, 그 빨간약을 받고 모피어스가 바라던 대로 행동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시온이 파괴되면 인간에게 주어진 매트릭스라는 환영이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르겠지만, 현실의 삶이 고통이라면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고통을 인내해야 할까?는 중대는 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나는 전혀 고통스럽지 않아도 여전히 유효하다. 분명 오늘 지금 어디에선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체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사람의 슬픔은 인류 전체의 슬픔이다. 슬픔을 양으로 나타낸다면, 1/76억이 되려나? 어떤 상태는 역치가 있고 하나둘 슬퍼지면 오셀로 게임이 뒤집히듯 뒤집히는 것은 아닐까?
네오에게 그런 것처럼, 모피어스나 트리니티가 그 해답의 일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글쎄.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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