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외면일기

책임지는 게 영웅: 캡틴마블 혼영기

타츠루 2019. 3. 20. 12:00

캡틴마블 시청기

혼영

히어로물은 왜 나오는가? 여성전사, 꿈, 딸


마블의 시리즈가 나는 익숙하지 않다. 내가 기억하는 영웅물의 주인공은 용소야, 혹은 용호야, 플래시맨, 천재소년 두기(영우이라고 말하기 그렇지만, 그 당시 분명 나에겐 영웅의 이미지였다.), 앤디인가 에디. 혼자 다니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만화방 만큼은 혼자 갔다. 용돈을 모아 만화방에 가서 대여섯권을 빌려놓고, 컵라면을 두고, 집에서라면 한 젓가락에 먹을 수 있을만큼 담겨 나오는 김치와 먹는 그 맛. 만화책을 읽으며 주변의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 공간에서 묘한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그리고 그러면 안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국민학교 때 갖가지 영웅들(철인28호를 조종하던 그 박스를 얼마나 갖고 싶어 했던가?)을 보면서 나도 내가 미처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나 숨겨진 능력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너클볼을 던지게된 키작은 야구소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나도 노력만 한다면 저렇게 대단한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분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찮은(?) 만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곧 깨닫게 된다. 그 시기는 묘하게 사춘기랑 맞아 떨어져 가뜩이나 여드름 때문에 볼품없어진 얼굴인데, 자신감도 더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쉽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마음 속은 태풍같은 불안 속에 떠 있는 종이배 같지 않았나 싶다.


최근에 영웅물을 보면서는 영웅들의 책임에 더 마음이 쓰인다. 나는 작은 가정을 책임지고(그렇다고 나만이 가장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내에게 의지하고, 우리 둘 모두가 있고, 아이들이 있어야 나의 가정은 온전하다), 학교에서는 한 학급의 학생을 돌보면서 책임의 무게를 늘 실감한다. 가끔은 어떤 것도 내가 원하는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쓸 수 있는 힘이 생기지만, 나만을 위해 쓰면 안된다. 그게 책임이다.


영웅이 그 힘을 죽을 힘을 다해 얻은 게 아니라는 점에서 영웅의 책임감은 더 대단한 것이다. 선택하지 않으면 사실 책임도 없다. 선택의 결과는 선택한 사람에게 있다. 힘을 선택하지 않았으나 주어졌다면 누구도 그에게 ‘그 힘에 걸맞는 책임감’ 따위를 강제할 수 없지 않을까. 영웅들이 자신의 힘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순간, 그 순간이 사실 가장 극적인 것 같다. 그래서 베트맨 시리즈 중 제일 뜻깊은 장면은 다크 나이트라 생각하고.


일상에서 우리는 영웅이 아니더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만큼 책임의식도 가지기 쉽다. ‘선택’과 ‘책임’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머릿 속은 학교와 학생들로 채워진다. (그렇다. 늘 이런 식이다. 무엇을 보던, 무엇을 듣던, 나는 대개 학교와 학생들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적어도 나에게 교직이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24/365 당직과 같은 일이다.) 교육과정의 모든 부분을 학생들에게 선택하도록 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수업 방법들은 수업의 일부만이라도 학생들이 선택하고, 스스로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하도록 조언하고 있다. 선택지나 범위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은 일상의 공간에서도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선호나 필요를 알 때, 선택지가 주어져야 적절하게 판단할 수 있다. 옷을 사러 간다.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 되려면, 내가 필요한 옷의 디자인이며 색감이며 마감을 내가 선택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제품을 요구하고 그에 합당한 값을 지불하면 된다. 하지만, 비용의 문제는 빼더라도, 정말 매번 옷이든 속옷이든, 가방이든 지갑이든 필요한 혹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사면서 그렇게 면도날같은 취향을 드러낼 수 있을까? 불가능이다.


어쨌든 학생들에게 선택할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 그게 안되면 여러가지 방식으로 강제하게 된다. 그러면 일부 학생들은 그 강제에 굴복하고, 일부는 뛰쳐나가고, 일부는 자리는 지키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보내어 버린다. 누구도 만족하지 않는 상태인 것. 이전까지는 강제가 가능했다. 온 세상이 학교의 ‘강제’에 동의했다. 더 좋은 대학 가기 위해서, 학생이니까.. 따위의 기준으로 학생들의 의사는 무시했다.


지금의 학교는 일단 절차적으로는 학생의 의사를 묻고 있다. 다양한 선택지가 없는 경우도 있고, ‘No’라고 대답했을 때 기대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선택의 기회를 주고 있다. 국가교육과정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맥락에서라면, 교육목표를 이루고, 학생들이 그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강제하는 범위 안에서는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선택하지 않는 학생들이 하는 것은 밖을 보거나, 엎드리거나, 다른 짓을 하거나, 짜증을 낸다.


우리 사회는 학생의 선택을 보장하기 위해 충분한 돈과 시간을 쓸 준비가 되어 있나? 행정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 학생들의 교육이 정말 ‘돈 쓸만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는 지 궁금하다. 내게는 그게 문제다. 학생들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굉장한 책임의식을 느낄 수 있을까? 자신의 인생은 능력이 아니라, 그저 맥락일 뿐이다. 부모가 대신 선택해줄 수 있지만, 부모가 자녀의 인생을 책임 질 수 있나? 학생들은 어느새 '선택하지 않는 생활'에 길들여 지는 것은 아닐까? 선택도 없고, 책임도 없이 무기력해 지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의 주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는 얼마나 영웅적인가. 영화 시청기는 어디에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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