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외면일기

여름 날의 백도와 연합고사

타츠루 2021. 7. 5. 20:57

흑설탕 물 속 복숭아


여름 날의 백도와 연합고사

그 친구네 집에 백도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냉장고를 열면, 백도가 가득 담긴 스텐통이 여러개 있었다. 우리는 그걸 꺼내어 큰 국그릇에 담아 게걸스럽게 먹었다. 복숭아는 목을 타고 미끄러지듯 넘어가고 달달함에 시원함까지 집에서 맛볼 수 없는 간식에 정말 즐거웠다.

아들은 초당옥수수가 먹고 싶다고 하고 딸은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해서 퇴근길에 과일 가게에 들렀다. 옥수수도 사고 복숭아도 사고. 아내는 전자렌지에 옥수수를 익혀서 아들 간식으로 준비했다. 태권도 갔던 아들은 7시 정각에 마치고 나와야 하는데, 10분이 지나도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아내와 딸은 집 창문에 붙어서 태권도장을 내려다 본다. 이내 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학생과 함께 나온다. 그 여학생은 얼른 뛰어가고 곧 아들도 집으로 온다. 기분이 많이 좋은 우리 초등학생 아들.

복숭아는 실패다. 맛이 없다. 그저 복숭아’살’이 있을 뿐 특유의 달콤함이 없다. 그래도 그 중 조금 단 것은 딸에게 줬다. 어릴 때 친구 집에서 먹은 백도는 어떻게 만드는 걸까? 그리고 인터넷을 찾아봤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 그냥 설탕물에 넣으면 된다고 생각했을까. 게다가 집에는 백설탕이 없다.

물과 설탕 2:1 정도로 섞어서 설탕물을 만들고 거기에 그냥 맛없는 복숭아를 넣어 버렸다. 지금이라도 끓여볼까 싶지만, 내일 어찌되나 살펴보자. 아마 아내가 끓일 지도 모른다.

내게 잊을 수 없는 달콤한 여름 간식을 대접했던 그 친구와는 이제 연락이 되지 않는다. 30년전 그 친구 이름이 아직도 기억 나는 건 그 친구의 이름이 특이해서 만은 아니다. 누군가의 이름은 금방 잊고, 어떤 사람의 이름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내 마음이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잠자는 사이 내 몸이 그렇게 하겠지. 잊어야 하는 것을 잊었을거라 생각했다. 잊어야 했던 이름이 잊혀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친구는 중학교 때까지도 친했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학원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보습학원에 가면 국영수를 모두 배웠다. 나는 분명 주산학원을 다녔지만, 주산학원이 속셈학원이 되고 속셈학원이 국영수 학원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학원을 내내 다녔다. 구구단을 배우다가 영어도 배우고 나중에는 수학도 배우게 되었다.

연합고사를 준비하면서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집으로 가고는 했다. 고작 중학생이었지만, 해야 할 일-공부-를 하고 늦은 시간 집으로 걸어갈 때는 자못 스스로가 대견했다. 연합고사가 있다고 해도 그 당시의 내 성적을 생각하면 웬만해서는 인문계 진학을 못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성적을 받고 싶었다. 부산은 평준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더 좋은 성적을 받을 필요도 없었는 데 그랬다. 연합고사를 치고 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성적이 나오고 같은 학원을 다니던 친구들은 으레히 모두 합격했다. 그리고 서로의 점수를 비교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 친구에게서 직접 듣지 못했는데, 연합고사 시험 답안을 작성하면서 답을 밀어 썼다고 했다. 그 친구는 연합고사에서 떨어질 성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밀어 썼다니. 같은 답이 연이어 있는 경우에만 간신히 문제를 맞히지 않았겠나. 결국 그 친구는 상업계 고등학교로 갔다. 이후로 가끔 동네에서 보기는 했지만, 그전처럼 소식을 주고 받지 못했다. ‘

그때는 그 사건이 어떤 재난처럼 느껴졌다. 그저 별 탈 없이 매일을 보내던 중학교 3학년에게는 정말 재난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산사태가 그간 멀쩡히 쌓여 있던 담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답을 밀어쓰면서 인생의 평범한 진로가 크게 휘청이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 친구는 잘 견뎌냈을 것이라 믿는다. 자기가 갈 것으로 알았던 학교의 교복을 보면서 씁쓸해 하고, 집에서 먼 학교로 다니면서 같은 후회를 몇 번이고 했을 지 모르지만, 지금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지난 주에 시험이 끝나고, 학교에서 학생들과 성적을 확인하는 중이다. 내게 말하지 않지만, 자기 성적을 보고 만족하는 학생은 별로 없다. 학교에 와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성적이다. 오로지 학교는 학생들의 성적을 가장 중대한 문제로 삼고 있다. 학교가 그런게 아니라, 물론 세상이 그러하다. 그런 기대와 압박을 학생들은 받고 있다. 어른들은 여전히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은 공부하지도 않거나, 해도 안되는 놈이라 생각하거나, **하면 안 될리가 있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성적이 좋든 그렇지 않든 성적은 괴로운 고민거리이고, 벗어날 수 없는 고민거리다.

냉장고 속에 흑설탕물에 빠진 복숭아가 있다. 내일 쯤이면 시원해지겠지만, 친구 집에서 먹어본 그 맛일리가 없다. 이제사 찾아보니, 레몬즙도 조금 넣고, 통계피도 조금 넣고 끓여야 한단다. 끓이지 않은 저 흑설탕물 속 복숭아는 무슨 맛일까. 어릴 때 먹었던 그 맛의 ‘힌트’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내일 뚜껑을 열면서 그 친구를 한번 더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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