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정말 일찍 잠을 자야 하나 보다. 어제 12시를 넘긴 나는 오늘 아침 아침밥 먹으라는 소리에 깼고, 아침밥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가 점심밥 먹으라는 소리에 다시 일어났다. 아내는 3시부터 시작되는 재난안전교육을 신청해뒀고, 우리는 이른 점심을 먹고 합천으로 출발한다.
요즘 차 안은 제법 평화롭다. 늘 다투던 아들과 딸은 이제 제법 대화하며 놀기 때문에 아내와 나도 대화가 가능하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기능이 있는 아내의 차를 타면 운전도 더 수월하고, 급히 가려는 마음도 없어진다. 음악을 틀고 간식도 조금씩 먹으며 드라이브를 즐긴다.
조금 기다려서 교육이 시작된다. 집에서 지진 발생 시 행동요령에 대해 듣고 아파트 주방처럼 꾸며진 세트장으로 들어가서 지진이 발생하면 식탁 밑으로 몸을 숨기고, 지진이 그치면 가스를 차단하고 출입문을 확보하고 전기 차단기를 내린다. 딸은 무섭다며 체험을 거부한다. 태풍이 오면 바람이 어느 정도인지 체험도 가능했다. 가벼운 바람부터 초속 30미터까지 체험했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모자가 날아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엉클어진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보니 모자 쓰기를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태풍 매미의 순간 풍속이 초속 60미터였다니, 그 파괴력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차가 물에 빠지거나 했을 경우, 유리창을 깨고 나오는 체험도 했다. 이번에는 딸도 참여했다. 버스에서 흔히 보이는 유리창깨는 망치는 고무로 감싸져 있고, 저 창문으로 보이는 화면은 두드리면 깨지는 효과를 보여준다. 물론 다른 쪽에 이미 깨진 창이 있어서 뛰어내리는 방향은 반대쪽이다.
지진은 무서워 하던 딸도 버스에서 뛰어내리는 건 아주 잘했다. 그리고 3시 30분에는 승강기 안전 체험 교육장으로 가서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이용 시 주의할 점과 사고 시 행동요령에 대해 들었다.
교육을 진행하는 소방관님은 자주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고, 거기에 대답을 잘 하는 아이도 있었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들은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아는 건 잘 대답했다. 딸은 수줍어하고 좀 부끄러워했다. 다른 식구 중 여섯 살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소방관님이 묻기도 전에 조잘조잘 자기 이야기를 해댔고, 부모는 아이 입을 틀어막기 바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아이는 신이 나서 틈만 나면 답을 했다.
이런 교육 같은 데를 가면, 부모가 조교가 되거나 시범을 먼저 보여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그런 시범에는 먼저 나서고, 아들을 보고 씨익 웃어주며 모범을 보이려고 애썼다. 아들과 한번은 살아있는 동물들이 출연하는 어린이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공연이 끝나갈 무렵, 부모님들이 나와서 좀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나는 무대 앞으로 나갔다. 아들은 나를 응원하고. 그러더니, 연기자 중 한 분이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비단구렁이를 내 어깨에 얹었고 나는 그 구렁이를 안고 포즈를 취해야 했다. 전혀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좋아하더라.
부모는 아이가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있어 하고, 아는 것은 발표하고 해보지 못한 것도 씩씩하게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바람대로 되지 않고, 부모도 어릴 적에 늘 그렇게 행동했을 리도 없다. 나는 눈치껏 되도록 나서는 일은 피했고, 남들의 시선에 별 신경 안 쓰며 내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그렇게 어릴 때와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이에게 모범이 되려고 애쓰기는 하지만, 오늘은 아이가 보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빠는 역시 용감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에게 좋을까? 우습지만, 내가 너무 뭐든 잘 하는 게 아이를 되려 주눅 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아이가 된다면, 그저 우리 아빠가 제일 멋지고 제일 용감하고, 제일 힘세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 같다.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이가 응원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는 눈으로 나를 보면 나는 제법 용감해진다.
재난안전교육을 받으면서도, 지진이 난다면, 화제가 난다면, 차가 전복되거나 갇히게 된다면, 나는 정말 어떻게 행동할까 머릿속으로 생각해봤다. 무조건 우리 아이부터 살리려고 하겠지. 물불 가리지 않고 아이를 구하려고 애쓰겠지. 그런 생각이 참 쉽게 들어서, 나는 조금 내가 자랑스러워졌다. 싱거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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