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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회계약론'을 잘 읽어낼 수 있을까?

타츠루 2020. 2. 14. 22:12

부제 : 고전을 읽는 것은 왜 재미가 있나? 

여전히 콧물이 나고 몸이 ‘쳐지는’ 느낌이 있어서 점심을 먹고 바로 병원으로 갔다. 아내가 병원에 가려면 오늘 가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고, 그래서 점심을 먹고 바로 챙겨서 집을 나섰다. 12시 20분에 출발해서 12시 45분쯤에 병원에 도착. 도로를 타고 가면 시내까지 가는 길도 그리 멀지 않다. 낮 기온이 17도까지 올라서 일까 자전거를 타는데 기분 좋게 땀이 났다. 천천히 발을 저으며 땀을 식히며 도착했다. 진료를 마치고 당연한 듯, 지난번 받았던 약과 꼭 같은 약을 처방받아서 약국에서 바로 먹었다. 저녁에 먹는 약에는 진통제가 있으니 술은 피해야 한다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도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사회계약론에 대해 생각했다. 더 정확히는 왜 사회계약론을 썼던 루소가 여러가지 고초를 겪었느냐에 대해서였다. 이는 17세기 제네바나 프랑스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어서 더 탐구하기가 어렵다. 시간을 내고 루소나 사회계약론에 대한 글을 읽어봐야 한다. 역자 후기에서도 이 책이 '난해하다'라고 써서 나는 겁을 먹은 것 같다. 이 '책'만으로는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자꾸 의구심이 들었다. 루소는 자신이 겪을 고초를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자기 이름을 걸고 책을 냈다. 자신의 모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루소의 상황과 그 시대의 정치형태나 세상의 혼란에 대해 더 알 수 있다면 이 책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겠지? 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저자와 저자가 처한 환경에 대해 반드시 잘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왜 오래된 사회계약론을 읽어야 하나?’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나도 스스로에게 했다. 그리고 독서모임의 다른 분에게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글쎄. 간략히 내 생각을 얘기하기는 했지만, 정리된 생각은 아니었다. 

현재의 문제를 다룬 책을 읽다보니 결국 더 이전에 나온 책들을 읽어보라며 권했다. 누가? 책이, 책의 행간이, 혹은 저자가.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으면서도 차별을 이해하려면 결국 평등, 인권, 사회의 구성에 대한 더 깊은 논의에 결국 돌입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했다. 

인간의 역사가 어떤 방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속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는 건 명확해 보인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면서도 지금도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로 보건데 인류의 진보는 꾸준히 단계적으로, 양의 방향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전쟁과 같은 전 지구적인 혹은 적어도 꽤 광대한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겪는 문제는 참으로 '여전'하다. 고로 인간을 더 이해하기 위한 시도도 여전하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뇌신경학 분야에서는 예전에는 없었던 연구나 사례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또한 인간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인류가 탄생한 순간부터 우리가 직면했던 문제들에 대해 많은 철학자, 인문학자, 사회학자, 과학자가 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우리 현재의 문제에 대한 질문과 해결방안을 찾는 책들도 결국 그 아이디어는 우리 이전 세대의 위대한 생각들에 그 빚을 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내게 이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되었다. 월간 베스트셀러만 뒤적일 게 아니라, 인류사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뒤적여야 하지 않겠나. 그런 책들을 읽는 것이 결국 현대의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이해하고, 내 앞에 놓인 작금의 문제에 대한 고민에 도움을 줄 수가 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학생 간, 교사 간, 정책과 실행 간 문제들에 대한 결정은 그 문제만 지켜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학생이 지각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순간에도, 그 순간을 문제로 보면 당장의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는다. 차라리 학생이란 어떤 존재이고, 학교란 어떤 기능을 하는 곳인가에 대해 미리 고민해둬야 '한 번의 지각' 혹은 '여러 번의 지각'에 대해 대처할 수가 있었다.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과 관찰과 사고만으로 거대한 정치를 설명하는 루소의 능력에 우선 감탄하게 된다. 정말 오로지 이 생각을 하면서, 세상이 보여주는 것들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써만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아웃라이너도,  워드프로세서도 없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단어로 이루어진 글의 세계로 만들어 냈다. 이런 위대한 저작을 직접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원어로 읽는 것은 아니며, 그가 글을 쓴 맥락에 대한 이해나, 그가 타깃으로 삼는 독자의 지적 수준에 나는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읽어나갈 수 있다. 퀸의 멤버의 이름을 모두 외우지 못해도, 전 앨범을 다 들어본 적이 없어도, 제대로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더라도 우리는 퀸의 콘서트를 즐길 수 있다. 너는 퀸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퀸을 충분히 즐길 수 없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 내가 루소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고 해도, 유럽의 정치법의 발생이나 입법방식이나 행정력이 동원된 방식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나는 사회계약론을 즐길 수 있다. 이때 모른다는 것을 ‘앞으로 알아가야 할 것’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는 내 배경지식의 부족함에 대해 또 한번 통탄하지만, 그러면서도 글을 읽는 내내 즐겁다. 루소가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나의 지금, 여기에서’ 생각해보려 애쓰고 있다. 그에 대해 모르는 만큼 그의 의도를 오독할 가능성도 높겠다. 하지만, 이것이 그를 이해하기 위한 시작점이라 생각하면 또 한 번 즐겁다. 

내가 사회계약론을 지금 읽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지에 대해서는 간략히 정리했다. 그렇다면, 지금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을 ‘알게’되거나 ‘얻어’ 갈 수 있을까? 

- 일반의지가 무엇인지 정의해본다. 
- 최초 정부의 구성이 어째서 가능한지 생각해 본다. 
- 사회계약이 인민에게 이익이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 내가 사는 내 국가와 내 정부는 지금 나에게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가를 사회계약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 지금 내 국가와 정부, 국민 사이의 관계가 민주주의를 작동시키고, 사회계약이 목적한 바를 성취하는 데 부합하는 지 생각해볼 수 있다. 
- 시민불복종은 응당 사회계약론과 통하는 부분이 있겠다. 왜 그러한지 설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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