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의 생활이라는 건 자잘하게 기억할 게 넘치고, 자잘하게 챙겨야할 게 넘치는 곳이다. 교사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나는 정리하지 않던 사람에서 정리하는 사람으로 꾸준히 변화를 도모해 왔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생활하기가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학생들에게 학습지를 나눠줄 때, 학생들이 이 학습지를 잘 관리할까 걱정을 하면서 내어준다. (이건, 나만 하는 걱정은 아닐 게 분명하지만.) 학업 성취 수준이 높은 학생들 중 상당수는 이런 학습지 관리를 잘 한다. 선생님이 내어준 과제나 준비해야할 것, 시험범위, 필기 등등 모두 잘 챙긴다. 그래야지 갑자기 과제가 튀어나오거나, 수업 시간에 멍하니 앉아 있게 되는 일이 없다. (물론, 세밀하게 수업자료를 못 챙기거나 안 챙기지만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들은 게으름을 타고난 재능으로 극복하는 극소수다) 학습지를 내어 줄 때는 정리할 수 있도록 내 이름을 꼭 쓴다. 학습지에 쪽 번호도 붙인다.
내가 학생들이 정리를 잘할까 걱정하는 것은 내가 과거에 잘 정리하는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이 없었음에도 나는 용케 학창시절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으며 견딜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분도 아마 기억이 날 것이다.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받으면 곱게 접어 아무 책에나 끼워 넣는 학생을. 부모님에게 갖다주라는 가정통신문은 가방 안에서 오래 뒹굴어서 구겨지고 찢어지기 일쑤다. 그당시에는 가정통신문을 손으로 그리는 학생도 있었다. 갖고 오지는 않았는데, 선생님에게 혼나니까 그려서라도 내는 것.
요즘의 학생들은 더 챙길 게 많다. 물론 이전보다 한 학기 동안 듣는 교과의 수가 줄어들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수행평가를 적어도 한 학기에 한번씩 치니까 시험 횟수를 생각해도 늘었다. 지금 성인 세대가 학교에 다닐 때는 수행평가라는 게 음미체 과목에서만 시행되는 게 대부분이었고, 따로 준비를 한다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의 수행평가는 과제로 내주는 것이 아니라, 수업 시간 동안 평가하도록 권고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점수를 따려면 혼자서 준비해야 게 분명히 있다.
학생 때는 학습지 챙기는 게 힘들었던 내가 이제는 학습지를 만든다. 뚝딱 복사하는 게 아니고, 문제지에 있는 것들을 짜집기해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여러과정이 필요하고, 여러가지를 기록해야 한다.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도움이 더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면 학습지를 추가로 만들기도 한다.
요즘하고 있는 수업은 수동태다. 먼저 수동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하나 만든다. 구글드라이브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수업 때는 링크를 메모해 가서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수동태 학습지는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단계는 기초, 2단계 발전, 3단계 심화, 4단계 수동태를 활용한 자유 작문. 학급마다 수업 진도가 다르기 때문에 수업 진도를 따로 기록한다. 종이 치기 전에 교무실을 나서서 종이치는 중에 교실에 들어가서 컴퓨터로 수업 자료를 준비한다. 단어를 어려워 하길래 단어학습지도 만들었다. 어떤 반에 무슨 학습지를 나눠줬는 지도 기록한다. 한번에 모두 나눠주도 되겠지만, 그랬다가는 필요한 수업 시간에 가지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수동태 학습지의 경우, 과제로 나가는 게 아니고, 학생들이 써낸 영어문장은 다 살펴볼 생각이기 때문에, 수업 후에는 취합해서 교무실로 가지고 온다. 가지고온 학습지는 포스트잇으로 태그를 준비해서 학급을 표시하고 집게로 잘 묶어 둔다.
한 시간의 수업에 필요한 자료가 최소 2가지다. 프레젠테이션 파일과 학습지. 그리고 여기에 수업 진행을 어떻게 할 지 메모한 내용도 필요하고, 매일 아침 학교에 도착하면 먼저 챙기는 진도 상황도 따로 써둔다.
학생들의 진도 기록은 모두 노션에 기록하고 있고, 학생들의 상담기록이나 지나가며 한 이야기도 학생들 이름 아래에 모두 정리하고 있다. 와중에 상담을 하고 나면 그 내용도 손으로 써뒀다가 다시 기록을 해둔다.
과거의 내가 보면, 어떻게 지금 이렇게 하고 있나 아마 믿지 못할 것 같다. 내 손을 벗어나려는 학생이 아니라면, 학생을 챙기는 데 하나라도 빠지면 안된다. 누구나 무언가 원하고, 누군가는 내게서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한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늘 뒤돌아 보게 된다.
한 가지 수업 방법을 생각했다가도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으면 그 방법을 바꿔가며 어떤 방식이 더 나을지 생각해야 한다.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얼마나 배우는지가 중요하고, 그건 내가 모두 가르쳐서는 이룰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목표다.
오늘 수업을 마치고, 학생 하나하나가 찾아와 질문을 하는 걸 보면, 질문할 기회를 열어주는 데 성공했고, 질문할 만큼 딱 적당한 수준의 학습지를 만드는 데도 성공한 것 같다. 내일도 성공할 거란 확신은 없지만, 늘 이런 성취는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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