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외면일기

입원과 수술에 대한 기록

타츠루 2011. 11. 1. 16:20


스스로에게 쓰는 메시지라, 그냥 반말이네요. 





입원을 하면서, 3박 4일간의 버스를 타게된다.
내리는 시기도, 내리는 곳도 다르다. 하지만, 분명 내리게 된다. 쭈뼛쭈뼛 처음에는 자리를 잡고 조용히 자기 자리를 정리하지만, 곧 서로를 도와준다. 심심한 생활 서로에게 말동무가 되어주고, 서로에게 간병인이 되어준다.

입원하고, 수술하면서 있었던 과정에 대해서 또 금방 잊게 되지 않을까 해서, 그리고 앞으로 좀 더 몸을 조심히 다뤄야 겠기에 오늘의 두려움과 불편함과 무료함을 기록해둬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입원부터 수술 과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수술과정에 대한 묘사과정은 그다지 자세하지 않지만,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으엑' 혹은 '어머머' 혹은 '피가 낭자한 수술실을 상상'하게 되는 분들은 아래 글을 읽지 않으시길 바란다.


학교에서 배구를 하다가, 무려 친구의 발을 밟고, 오른발 옆날을 세워서 땅에 내려온다. 몸 속에서 우드득 소리를 들었고, 다시 읽어났을 때,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한다. 곧 경기는 끝났고, 병원을 찾으니 뼈가 부러졌덴다. 간단히 반깁스를 하고, 목발을 받고, 목발 사용법을 듣고 학교에서 간단히 짐을 챙겨서, 아주 이른 시간에 대리운전을 해서 집으로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 일 아니라 생각했다. 뼈 부러진 거 그거 그냥 깁스하고 있으면 붙는게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잘한다는' 병원을 찾는다. 창원 소답동에 있는 정형외과 전문의가 모여서 만든 메**병원. 난 새끼발가락이 그렇게 긴 것 인지 몰랐다. 생물 시간에 아무래도 인체의 뼈 따위는 중요하게 보지 않았나보다. 아무튼 긴 새끼 발가락 중간부분이 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볼 수 있었다. 이 틈은 일주일 후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처음보다 조금 더 벌어지게 된다.

아무튼 다시 병원을 찾기전, 집에서 반깁스를 한 채 지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어떻게든 내 몫의 집안일을 하고 싶었지만, 목발을 집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이 이유식 먹이는 정도. 내가 해왔던 일까지 아내가 다하는 걸 보니, 또 너무 미안한 생각이. 빨리 나아야지 하는 다짐은 계속하게 된다. 한 주 뒤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놀라며, '아니, 일주일 동안 이렇게 뼈가 완전히 붙다니 대단한데요. 한 번도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따위의 드라마틱한 장면을 상상해가며 웃기도 한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서 병원을 찾은 목요일(10월 27일) 뼈는 좀 더 벌어져 있었다. 지난 주의 사진과 이번주의 사진을 보여주는 데, 그 순서가 바뀌었으면 좋았을 걸 이라고 계속 생각했지만, 그건 초인적 회복력을 가진 인간이 되기를 상상했던 것처럼 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필름을 역방향으로 돌리고, 그걸 캡쳐 뜨고 싶은 느낌이었달까.

아무튼 다음 날 바로 수술하기로 결정. 수술은 간단하다고 하셨다. 15분 정도. 뼈에 철심을 박고, 와이어로 뼈를 당겨줘서 제대로 된 모양으로 붙게 한다는 것. 그렇다. 의사선생님의 말씀은 맞았다. 정말 실제 수술실에서 보낸 시간은 15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니. 마취는 척추마취를 해서, 하반신 전체를 마취시킨다는 것. 이때 나에게 마취는 계속 마비로 들린다. 왠지 공포스러운 어감 '마비'. 아무튼 이 사실(척추 마취에 대해서)은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혼자 수술을 하러 와야 하니, 따라오지도 못할 사람에게 더 큰 걱정거리를 주는 게 싫었으니까. 쿨하게 수술 잘 받고, 사실은 이랬어라고 말하는 강한 남편이 되고 싶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말하긴 했다. 하지만, 수술 들어가기 전, '당신이 왔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라고 쿨하지 못한 문자를 보낸다. 어푸.

수술하기 전, 그러니까 목요일 밤 12시부터 금식. 그리고 아침 9시에 병원에 와서 엑스레이를 찍고, 수술 동의서를 쓰고, 수술을 위한 검사(혈액검사, 심전도 검사, 흉부사진, 복부초음파)를 하고, 입원실이 비기를 기다렸다. 한 명의 입원화자가 나가야 다른 환자가 입원할 만큼 정말 장사 잘되는 병원인 것이다. (이곳은 정말 '잘하는 병원'이 분명해. 그리고 이렇게 잘하는 병원에 온 나의 수술은 모두 잘될거야 다시 주문도 건다.)

11시가 조금 지나 입원을 하고, 등에 여미는 상의를 입고, 수술할 쪽 다리 전체가 옆트임되어 있는 하의를 입었다. 그리고 별로 고프지도 않은 배로 수술 끝나고 오늘밤이 될때까지 배가 고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생각한다. 수술시간은 2시 30분. 아내에게 문자를 보내고, 수술시간을 기다린다. 거의 정확한 시간에 간호사는 나에게 왔고, 화장실에서 다시 물을 한번 버리고 수술실로 가는 침대에 눕는다. 이거 올해 초에 누워봐서 알지만, 누워서 수술실로 끌려 가는 게 상당히 기분이 이상하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걷는 것처럼 어지럽고, 떨리는 침대의 바퀴만큼 내 기분도 동요된다.

백색형광등이 밝은 수술실. 난 파마할 때 쓰는 것 같은 머리 커버를 쓰고, 상의를 벗었다. 수술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가요에 세상으로부터의 '격리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최신가요에 관심이 있어서 그 가사까지 알았더라면, 어쩜 마음 속으로 크게 흥얼거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일었다. 수술을 준비하기 위한 의사들이 들어왔고, 마취를 위한 의사가 들어왔다. 나는 뱃 속에 들어가 있는 아이처럼, 혹은 대장내시경하는 환자처럼 눈은 배꼽을 향한채로, 다리를 모으고 몸을 웅크려, 내 등을 활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등에 마취 주사 몇 방.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무 긴장해서 바늘이 잘 안 들어간다는 의사 말에 나는 부던히도 몸의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헌데, 긴장을 다 풀었는 데도 바늘이 잘 안 들어 간단다. 휴~ 힘을 좀 써보세요. 그리고 다시 바로 누워서 내 다리는 마취되어 갔다. 의사는 내 어깨와 내 배를 꼬집으며, 어느 쪽이 더 아픈 지, 똑같은 정도로 아픈 지 물으며, 마취되는 정도를 살펴봤다. 추위에 두려움이라는 촉매까지 더해져 내 몸은 차갑게 끌어오르는 것처럼 떨리더라. 준비되어 있는 따뜻한 상체 덮어주는 옷 같은 것이 있더라. 그걸 세장째 갈았을 때, 수술 준비는 다 되었고, 내 오른 발은 가볍게 공을 차내는 것 같은 자세를 한 채로 고정되었다. 난 내 두다리를 하나의 덩어리로 느낄 수 있었지만, 다른 통증이나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마취가 되어서도 난 내 다리의 움직임을 알 수는 있었다. 내가 제일 듣기 싫고 겁났던 소리는 드릴 소리였다. 뼈에 철심을 박아 넣으려면 구멍을 뚫어야 하니까. 헌데, 그 소리가 그렇게 '굉음'은 아니었다. 집에서 쓰는 큰 전동드라이버 소리 정도. 그 모터소리는 입 안의 나쁜 녀석들을 무너뜨리는 치과 드릴에 비하면 별 거 아니었다. 아무튼 그러고는 천천히 수술은 시작. 2시 45분 시작되었던 수술은 3시에 마무리. 그 뒷정리 시간이 지나고 수술도구 준비실이면서 일종의 환자 회복실인 곳에서 난 이불 속, 다리 밑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느끼며 몸을 좀 데울 수 있었다.

수술을 준비하면서, 의사들은 마산대학교 축제게 놀러간 이후로 연락이 없는 동료 의사 얘기를 했고, 그가 술을 마셨을 것이고, 이런 행실은 한 두번이 아니니 이 사람 어쩌려고 하나 하는 말들이 오갔다. 점심 시간을 넘기고 김밥을 먹었으며, 그래도 남자보다 힘 잘 쓴다는 여선생님의 말씀도 들었다. 오전 수술은 할 만한 데, 오후 그때쯤 수술이 가장 하고 싶은 기분이 덜하다는.. 나에게는 좀 불안하게 들릴 수 있는 얘기도 들었다. 서로의 별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특별한 별명이 없는 한 의사는 좀 섭섭해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사실 다들 좋은 별명을 원한다.

수술 준비실이며 회복실인 곳에서, 나는 고개를 조금씩 움직여 본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고, 누가 나를 '사람'으로 의식하고 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수술하기 전, '잘 부탁해요'라고 말할 뻔 했다. 수술 중간에도 '저기 저 꺼진 조명을 통해서 제가 수술 장면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데 치워주면 안되겠느냐(물론 곧 불을 켜고 사용되었던 조명이다.)'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어떤 개인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불안감이 덜 할 것 같다는 필사적인 느낌이 들었다.

한 5분 정도만에 담당 의사선생님은 가장 중요한 수술과정을 마치고, 나머지 마무리는 다른 선생님이 했다. 그러고 나가시면서 '수술은 다 잘 되었어요. 말하던대로 잘 되었어요.' 하셨다. 하~' What a relief. '당연하죠' 생각해왔지만, '당연한 것으로 바라는 것이 실현되는 것이 가장 즐거운 곳이' 바로 병원이다. 간단한 수술에 복잡한 실수 따위가 변수 따위는 없기를 간절한 마음이 되어 바라는 게다.

그렇게 병실로 다시 왔다. 척추 마취의 경우에는 6시간 정도 지나야 뭐라도 좀 맛볼 수 있단다. 물이나 죽. 마취 풀리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구나. 그래도 전신마취 따위가 아닌 게 어디냐. 내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는 게 얼마나 또 두려운 일이냐. 그것도 내 몸에 말이다. 국민학교, 불주사 맞을 때부터 주사 바늘이 내 몸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봐야 더 안심이 되었던 나이니까.

마취를 한 시점부터 거의 15시간 지난 시점인 다음날 새벽 6시까지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고개를 들 경우에 두통에 시달릴 수 있데서. 그래서 수술 마치고 한 자리에 계속 누워 있었다. 휴~. 그것도 고통. 생각했던 것보다 아프지 않았다. 처음 다리가 부러졌을 때 느꼈던 욱신거림 정도. 헌데, 엉덩이뼈랑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겸사겸사 진통제를 11시쯤에 한대 맞았다. 별 소용은 없었고, 잠은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나는 모로 누웠다가 바로누웠다가를 반복하면서 내 아픈 엉덩이를 구제할 방안을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 새벽 6시가 지나서야 '앉으므로써' 내 아픈 엉덩이와 엉덩이뼈를 구할 수 있었다. 부기 때문에, 상처 부위의 통증 때문에 수술 부위에는 엄을팩을 계속 대고 있었다. 척추마취 후에는 소변을 보는 게 중요하다고 해서 소변도 문제없이 봤다. 다행히 다른 볼 일은 보고 싶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다. 옆에서 간병하던 사람을 엄마에서 아빠로 교체했던 것도 참 다행한 일. 물론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을 것 같지만, 아무튼 간병인이 필요한 꽤 큰 수술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냥 나아갔다. 드레싱을 하면서 보니 꿰맨 자국도 있다. 물론 그렇겠지. 아, 저 부위를 다시 갈라야 하는 거야 라는 생각. 휴~ 철심을 다시 뽑아야 할테니까. 나는 또 이번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수술은 물론 훨씬 더 간단하겠지.. 별 반차이는 없겠지만. 하지만, 수술 후 회복과정을 또 겪어야 한다. 다음에도 또 3일정도 입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 집에서 자지 못하고, 내 아내와 함께 밥 먹지 못하고, 내 아들에게 이유식이며 간식을 떠먹이지 못한다. 그런 3일이 나에겐 큰 고통이란 걸 또 깨달았다.

처음에 쭈뼛쭈뼛 한 덩이로 어울어진 502호 공동체에 끼어들었던 것 같았지만, 이제는 수술들어가는 옆 침대 아저씨가 걱정된다. 내 식판은 늘 좀 덜 아픈 분이 치워주시고, 반찬도 나눠먹는다. 손님들에게 받은 음료수는 병실 냉장고에 넣고 아무나 빼먹는다. 밥을 먹고 나면, 또 환자 가족 중 한 분이 커피 마실 사람이 있는 지 살펴보고, 커피도 타주신다.

며칠동안 이지만, 사람들과 정이 들고, 우리는 그냥 환자복을 입은 아픈 사람으로서 서로를 대접한다. 얼굴을 보고, 침대 앞에 보이는 나이를 보고 하대하고, 존대하기도 하지만, 무슨 일을 하네, 집이 어디에 묻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 이 공간에서의 여행만을 즐기고 서로 도왔다. 재미있을 일이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다시 어딘가 다른 곳에서 서로 만나리라.

헌데, 다시는 병원에서 만나지 말고, 아픈 채로 만나지 말아요. : )


2011. 10. 31일 밤 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