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정수리를 보며 생각했다.
시험기간은 시험기간이구나.
수업 때야 어찌 되었든 시험 기간만큼은 학생들이 한껏 긴장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시험지를 받고 바짝 집중한 모습으로 앉아서, 종이 치면 강아지가 파묻어 둔 뼈다귀를 찾기라도 하듯 시험지를 파댄다. 도와줄 수는 없지만 응원하는 마음, 걱정하는 마음이 되어 학생들을 쳐다본다.
시험지를 받아든 학생들의 기분을 어른들은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일단 내 기억부터 주섬주섬.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도대체 시험 문제가 어디서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모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읽고 또 읽고, 외우고 쓰고 하다가 '차라리 당장 시험을 쳤으면 좋겠다'라는 기분이 되어 버린다. 시험 당일이 되고 감독 선생님이 시험지를 들고 들어오면, 이제 뭔가 속 시원한 기분이 된다. 맥주잔을 기울이면 맥주가 흘러넘치듯, 머리를 조금 기울이면 공부한 것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머리를 기울이지 않고 기다린다. 시험지를 받고 거기에 쏟아내야 한다. 나는 시험지를 펴고 문제를 확인하는 순간이 좋았다. 문제를 보는 순간, 아는 것, 모르는 것으로 분명히 나뉜다. 몇몇은 아리송한 것으로 나뉘기는 하지만. 아무튼 시험지를 받고 문제를 확인하면 '뭐가 나올지 모르겠다'라는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서 마음이 가벼워진다. 불확실은 모두 사라지고, 확실함만 남는다.
확실함, 빤히 예상되는 결과가 주는 쾌감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측가능하다면 그게 재미있는 삶일까. 시험문제를 확인하면 '무엇이 문제에 나올까?'라는 걱정, 불확실성은 해결된다. 하지만, 그럼 나는 얼마나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까 라는 문제는 여전히 미결 인체로 남아 있다.
학생들을 보면서, '저 아이는 어떤 기분으로 시험을 치르고 있을까?' 생각한다. 어쩜 기분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얼른 결승점에 들어가고 싶어지지 않나. 준비를 오래 했건 그렇지 않건 다 뛰어버리고 결승점을 지나쳐 좀 쉬고 싶은 기분일 게다.
학생들은 시험을 괴로워한다. 누구에게나 시험은 부담이 된다. 그 부담감은 어디서 비롯될까. 그냥 '평가 당하는 게 싫어서?' 시험은 나의 성취를 인정받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내 실력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불안. 그 결과를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 시험에는 작용한다. 온통 통제하지 못하는 것 투성이다. 시험이라는 시공간에 들어가면, 오로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 엄중한 시험 중 하나인 수능을 보면 시험이 얼마나 사람을 통제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앉은 공간은 제한된다. 사실상 움직일 수 있는 공간도 제한된다. 의심을 살까 염려 되기 때문에 고개를 높이 들 수도 없다. 두 손은 늘 책상 위에서만 머물 수 있다. 고사장에서 받은 필기구를 써야 한다. 시험에 나오는 문제들은 '대비'는 할 수 있지만, '미리 볼 수'는 없다. 시험이 시작되면 허락 없이는 나갈 수가 없다.
시험장에서 느끼는 것은 불안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감시당하는 존재이며, 제한받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려서 느끼는 갑갑함. 시험을 치고 터지는 탄성은 그런 바를 잘 보여준다. 수능시험장에서는 그런 탄성을 들을 수는 없지만, 조용히 내뱉는 숨소리는 알아차릴 수 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시험이 끝나는 종이 울리면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서기 바쁘다. 친구들에게 다가가기 바쁘다. 시험 마지막 날이 되고, 마지막 시험 시간이 되면 교실 안은 물 끓이는 냄비 같다. 시험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냄비 뚜껑을 차내고 환호성 내지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명상의 방법에 보니, 근육의 이완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어떤 부위에 힘을 주도록 할 때가 있더라. 주먹을 잠시 꽉 쥐었다가 힘을 빼면, 긴장하지 않는 그 편안한 상태가 어떤지 더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시험'을 그렇게 이용할 수는 없을까. 벼락치기 하느라고 체력이 소진되고, 마음도 불안하여 오로지 지나가고 싶은 터널처럼 생각될지 모른다. 어려움이 닥치면 당장 다른 곳을 쳐다보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어떻게 견딜까. (나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피할 수 없는 것은 즐길 수도 없다.)
나는 오래 전에 일어났던 괴로웠던 순간을 생각하고는 한다. 누군가와 싸워 상처 받았던 순간, 다리가 부러져 수술실에 들어가 마취하던 순간. 당시에는 너무나 견디기 어려웠지지만, 결국 그 순간이 지나갔다는 점에만 집중한다. 행복한 순간은 행복한 순간대로, 힘든 시간은 힘든 시간대로 모두 지나가더라. 잡고 싶은 시간이 있고, 날려 보내고 싶은 시간이 있지만, 분명한 점은 단 하나다. 모든 일은 지나간다. 그렇게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어도 괴로운 마음은 괴로운 마음. 그래도 가끔 나는 오래전 괴로웠던 순간을 생각한다. 사라진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처럼 생각할 때마다 괴로운 일이 있다고 해도 지나갔다.
(그래도 아프긴 마찬가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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