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 위치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
올해에는 수능 감독관을 하지 않았다. 관리요원으로 시험이 끝나고 감독관들이 가지고 온 답안지와 문제지를 점검하고 오류 사항을 찾았다. 시험 감독을 하면 최소 한 시간 반 이상 서 있어야 한다. 올해에는 교실 뒤에 의자 두 개를 갖다 두고, 필요한 경우 잠깐씩 앉으면서 감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어쨌거나 아픈 다리를 잠시 쉬게 하는 것이라 감독은 힘들다. 게다가 감독관의 실수 때문에 수험생이 피해를 입을까 봐, 수험생의 부정행위를 혹여나 방조하여 문제가 일어날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된다. 수능 응시생이 많이 줄었다지만, 어쨌든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생활까지의 학업 성취를 마무리하는 시험이다. 수험생도, 학부모도, 감독관도 긴장한다. 온 한국이 긴장하여 우리나라 전체가 조금은 조용해지는 때가 수능날이다.
감독관보다 일찍 학교에 가야 해서, 알람은 5시에 맞추고 잤다. 딸 덕분에 1시에 깼다가 3시부터는 자다깨다를 반복 했다. 알람 소리에 놀라서 깨어 씻고 학교로 향했다. 6시도 되기 전. 학교는 고요하다. 그래도 야간 당직하시던 분이 켜 둔 전등 때문에 온 학교가 환하다. 마치 등대라도 된 것처럼 모두에게 길을 안내하는 것 같았다. 전날까지 닦고 치우고 한 덕분에 학교는 잘 살균된 실험실 같은 향을 풍기기도 한다. 사람의 인적은 없고, 무엇하나 흐트러진 데가 없어서 더 그렇다.
입실 마감 시간이 되면서 긴장이 시작된다. 아침에 등교해서 열이 나는 학생이 혹시나 있겠나 했지만, 37.5도를 넘기는 학생이 생겼다. 그 학생들은 준비해둔 시험실로 향했다. 학생들은 문진표를 작성하고, 별도 시험실에서 시험을 치르겠다는 서류를 작성한다. 그리고 시험실을 감독하는 선생님, 발열 담당하는 선생님 모두 긴장한다. 세세한 매뉴얼이 있다지만, 매뉴얼을 가지고 다니거나 모두 암기할 수는 없다. 그래도 분업이 되어 있는 덕분에 각자가 해야 할 일은 한다.
시험이 마칠 때마다 감독관들이 가지고 온 답안지를 확인한다. 마킹안 된 답안지, 마킹이 잘못된 답안지, 결시자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응시표를 잡아내지 못하면 안 된다. 살피고 다시 살피고, 다른 선생님과 교차하여 살핀다. 내가 놓치는 부분이 생기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놓친 부분을 찾기도 한다. 그렇게 긴장을 해서 그런가 나는 '내 적성에는 수능 감독관이 맡겠다.'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 점검이 끝나면 홀가분하게 휙 돌아서 가는 감독 선생님들 뒷모습이 부럽다.
4교시까지의 시험이 끝나고, 마지막 5교시 외국어나 한자를 선택한 학생들의 시험이 끝난다. 그 동안 또다시 최종적으로 답안지를 점검하고, 도장을 찍고 밀봉한다. 5교시 답안지가 밀려오고, 또 확인하고 점검한다. 그렇게 다 하고 나니 6시 20분. 답안지는 이름표를 달고 박스에 담겨, 경찰차의 호위를 받으며 교육청으로 간다. 오늘 하루 12시간 넘는 시간을 학교에서 긴장하다 보니 피로가 심하다. 평소 때보다 훨씬 맛있는 점심 급식을 먹었지만, 도대체 그 맛을 즐길 수도 없었다.
집으로 오니, 아들, 딸이 "아빠" 소리 지르며 매달린다. 당장 손을 씻어야 해서 얼른 아이들을 떼어내고 손을 씻고 옷부터 갈아입는다. 아내가 끓여준 떡국을 먹으며 깊은숨을 내쉬며 몸을 좀 쉬게 한다.
업무를 거의 마쳐갈 때쯤, 오늘 나를 얼핏 봤다는 재수생 제자의 문자가 와 있다. 잠깐이지만 봐서 좋았고, 시험 잘 쳤노라고. 다음에 밥 한번 먹어요 하는 문자였다. 마주치고 인사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미술을 준비하던 학생이라 수능이 끝나도 아마 학원에 가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실기를 준비해야겠지. 힘내라고 답을 보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가족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거나, 친구들과 시내로 나가 '풀어져' 버릴 시기인데. 자칫 방종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학생들이 좀 안전해지기는 했지만, 전혀 안전하지 않아서 시험을 치고 나도 그저 어벙벙한 다음 날을 맞이하게 될 수험생이 안쓰럽다. 내일까지는 전국 고등학생들은 온라인이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다음 주부터는 어쨌든 다시 학교로 나오게 된다.
수능 이후에 학생들 사이의 전파는 있었을까. 코로나는 사람들을 더 얼어붙게 할까.
올해 초에는 2학기에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10월이 넘어가면서는 내년 새학기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내년의 새 학기는 올해의 3월보다는 혼란스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더 희망적이지도 않은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수능은 끝이 났고,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다. 고3 학생들은 완전히 다를 것 같던 내일의 해도, 오늘의 해와 별다를 바 없다는 점에 조금은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까 싶다. 수고했어요.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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