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관련

관계의 영재들

타츠루 2020. 12. 10. 11:56
영재들이 사는 곳



주의 : ‘관계의 영재들’이란 제가 학생들을 관찰하고 어떤 부류의 학생들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입니다.



학교에는 한 반에 한명정도 관계의 영재들(이하 영재) 있다. 어쩜 천재인지도 모른다. 학급이 안정되어 있다면 그 학생의 역할도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도 이 글을 읽고 나면 ‘관계의 영재’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영재는 혼자 다녀도 외로워 하지 않는다. (물론 혼자 다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선생님에게 혼자 잘 찾아와서 하고 싶은 말도 잘 한다. 다른 친구들이 없어도 해야 할 일은 잘 챙기는 편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도 편안한 표정이다.

늘 같이 다니는 학생이 바뀌는 편이다. 이건 영재가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른 학생들이 원해서 그렇다. 그 학급의 혹은 그 학년의 여러 학생들이 영재와 같이 있기를 바란다. 영재에게 ‘같이 가자’, ‘같이 하자’고 한다. 학교 안에서 ‘같이’할 수 있는 일은 많다. 화장실 가기, 음악실 가기, 체육관 가기, 쉬는 시간에 같이 돌아다니기. 담임선생님에게 같이 가기, 질문하러 교무실 같이 가기. 같이 하기 중에 제일 중요한 건 ‘밥 같이 먹기’다. 적어도 내가 근무하는 여자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은 밥을 같이 먹는 친구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밥을 같이 먹는 친구가 가장 가까운 친구일 가능성이 높다. 영재는 자기 과제는 다 못해도, 자기 할 일이 좀 바빠도 다른 학생들이 가자는 데라면 따라간다. 귀찮아 하는 기색이 없다. 조바심 내는 때가 없다.

성적으로는 두각을 나타내지 않을 수도 있다. 선생님과 꼭 친하게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없다.

영재는 싸우는 경우가 없다. 영재가 끼어 들면 친구들 사이의 다툼이 중재된다. 친구들은 고민이 있으면 영재에게 온다. 영재는 들어주고 또 들어준다. 들은 고민이나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다른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느라 영재는 바쁘다. 고민을 들어주면서도 귀찮아 하는 기색 따위는 없다.

학년도가 끝날 때쯤 학생들을 만나서 한번 물어보자. 누구랑 제일 친하게 지냈니? 혹 좀 불편한 친구는 없었니? 영재는 ‘제일 친한 친구’를 꼽기를 어려워 한다. 모두다 너무 친하기 때문이다. 불편한 친구 따위는 없다. 영재는 혼자 밥을 먹거나, 같이 밥 먹을 친구를 챙기기도 한다.

교실 안의 우정이 모두 모여드는 허브가 있다면, 혼자 고립된 섬 같은 학생도 있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고립을 견디지 못하거나 관계에 허기를 느끼면 문제가 된다. 학급에 영재가 있다면 영재에게 슬쩍 부탁해보면 좋다. 꼭 같이 가서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누군가 ‘너 밥 먹었어? 오늘 맛있는 거 나왔으니까 얼른 먹으러가.’ 라며 챙겨주기만 해도 된다. 우리는 자주 ‘우리는 챙겨주는 말’에도 감동하고 그 말에 기대게 된다.

나는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이 교실 안에서 제법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교육과정이 대부분 ‘학업능력’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성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다양한 지능 혹은 재능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대인관계지능’이다. 그런 학생들을 만나게 되면, 그 아이의 미래를 기대하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한다. 마치 온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과 안녕을 주러 온 천사처럼, 나는 그런 학생들에게 기대하게 된다.

모든 학생이 전교 1등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학생이 ‘관계에 있어서의 영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 덕분에 교실이 따뜻해 진다고 생각한다. 성인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물론 만나는 학생들의 수에 비해 성인들의 수가 적어서 그런 영재를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아, 일단 나는 아닌 것 같고) 그래도 만나면 반갑다. 그리고 그들의 지능에 감사하게 된다. 대학입시나 내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자신들의 지능으로 세상을 밝혀 왔으니 말이다.

꼭 관계의 영재들만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학창시절을 기억하는가? 내가 아프거나 힘들 때, 슬그머니 내 뒤에 따라와 주는 사람. 그 사람이 소중하다. 오늘 한 학생이 감기몸살이 심해져 수업 중에 가방을 싸서 조퇴를 했다. 그 학생은 공부하는 친구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가방을 싸서 스르륵 교실을 빠져 나갔다. 나는 반장에게 ‘반장, 누구누구 조퇴하니까 수업 들어오는 선생님들에게 그렇게 말해’ 라고 일러둔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한 학생이 복도로 나가 조퇴하는 학생의 안부를 살핀다. 조퇴한 그 학생은 병원에 가 진료받고, 약국에서 약을 타서 먹고,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생각하겠지. 그 영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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