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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글쓰는 방법 : 비주얼노트 활용, 노션, 템플릿

타츠루 2021. 9. 1. 22:19

필기구와 필통

어떻게 매일 쓸 수 있을까? 작년에 처음 매일 글을 쓰거나, 블로그 포스트를 올려야(글과 블로그 포스트는 좀 다르다. 블로그 포스트는 이라고 하기 어렵고, 사진 몇 장에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그걸 글이라 하긴 어렵다. 나의 생각이나 감상이 들어가 있지 않다면.) 다짐하고 나서 초반에는 매일매일 무언가 써나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시간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글감을 찾는 일은 쉬웠다. (혹은 지금 돌아보면 쉬웠던 것 같다.) 나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쌓여 있었고, 그걸 쏟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정도가 지나자, 흘러나올 것 같은 이야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매일 쥐구멍에서 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기다렸다.

쥐는 배고프면 집을 나서겠지만, 글감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웅크려도 글감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비주얼 노트 쓰기를 시작했다. 어제부터도 그렇게 하고 있다. 내가 쓰는 비주얼 노트는 ‘본 것’, ‘들은 것’, ‘먹은 것’, ‘산 것’에 대해 쓴다. ‘본 것’과 ‘들은 것’은 각 2분씩 제한하고 쓴다. ‘먹은 것’과 ‘산 것’은 대개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제한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하고 나면 하루를 다시 살펴볼 수 있게 된다. 결국 하루 동안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이 나의 하루를 지배한다. 보고 듣는 와중에 생각하게 된다. 생각은 결국 외부나, 내부의 자극에 대한 인식, 그 인식을 발전시켜 나가거나 그에 반응하는 것 아닌가.

글을 쓰려고 앉아서 글감을 쓰려고 하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접근을 바꿔야 한다. 글을 쓰려고 앉은 순간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쓸만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본 것’과 ‘들은 것’부터 쓴다. 그러면 마치 하루라는 시간을 넣어 채를 치듯 내 주의를 끌었던 일들만 자리에 남는다.

오늘은 그래서 다시 매일 쓰는 방법에 대한 글이다. 누가 돈을 주면서 쓰라고 하면 어렵겠지만(그래도 좋긴 하겠다.), 나의 글은 그저 내 마음 가는 대로 쓰면 된다. 그러니 글감만 하나 건지면 된다. 머릿속에 이야기가 떠오를 때 쓰지 않고, 내 마음을 잠시라도 사로잡았던 이야기를 끌어와서 한 문장을 시작하면 된다.

어제도 비주얼 노트를 쓰고, 오늘도 비주얼 노트를 썼다. 그러는 사이에, 오늘 나를 즐겁게 했던 목소리,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메시지가 떠오른다. 여름 계곡,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작은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다. 물속에도 길이 있는 것처럼, 빠르게 부드럽게 미끄러져 가며, 서로 장난치며 수영을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보여줄 겸, 저놈들 중 한 마리만 잡아보자 하고 내가 다가가면, 내 두 기둥 같은 다리가 일으키는 물살에 물고기들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물고기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차라리 다릿발이 된 듯 다리를 붙이고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글감을 찾는 일도 그렇다. 글감을 찾아야해 하고 달려들면, 글감들이 모두 숨어버린다. 손에 쥘 수 없고 모두 빠져나가 버린다.

비주얼 노트는 마치 물속에 들어가 돌이 된 것처럼 가만히 있으면서 물고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물론 오늘 본 것과 들은 것을 생각해내는 데 적잖은 에너지가 들어가고, 또 “하루를 보내고 나서 이렇게 기억나는 게 없나.” 자신의 초라한 기억이 한탄스러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보고 들은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떠올리는 것들은 내게 작은 인상이라도 남긴 것들이다. 보고 들은 것들을 펼쳐 놓고, 그나마 내게 인상을 깊이 남긴 것을 찾는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한 문장을 쓰면 된다.

대가들처럼 아주 좋은 첫문장을 쓰고, 쓰는 나에게도 읽는 누군가에게도 아주 솔깃 보이는 문장을 쓰면 좋겠지만, 그런 욕심은 버리자. 대신 시간의 순으로 쓰지 않으려고 애쓴다. 시간의 순서로 말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가 되려면 차라리 본론부터 내놓거나, 내 마음에 일었던 인상을 질문으로 바꾸는 게 좋다. 예를 들면, 오늘 내가 본 것 중 하나는 ‘요즘 나에게 너무나 반갑게 인사해주는 한 학생’이다. 복도에서 만나면, 선생님~부르며, 비행기에게 출발 신호를 보내는 기수처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환영하는 팬처럼, 두 팔을 크게 흔든다. 그 학생에 대해 쓰려면, 이렇게 쓰지 않을까 싶다. “***가 요즘 너무나 반갑게 팔을 흔들며 인사한다. 1학기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왜 그러는 걸까?”

두 번째 문장에는 당연한 생각 따위는 쓰지 않는다. “그 학생이 그저 내가 좋아졌나 보지.”라고 쓰면 안 된다. 나는 그 학생이 가진 이유를 모르니, 차근히 탐구해야 한다. “1학기 때보다 내가 더 반가워졌거나, 내가 더 낯익어서 편해진 걸 수도 있겠다. 왜 더 반가워졌을까? 어떤 점에서 그 학생만 유독 나를 더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럼 나는 어떻게 대해주는 게 좋을까?” 당연하다 받아들이면, 생각은 갇혀 버린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그저 탐구하기를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글은 늘 완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이 완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은 모습을 갖추고, 물리적 공간을 차지한다. 내가 쓴 이 글은 어떤 서버의 아주 작은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기억되려면 전기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은 모습이 없고, 끝도 없다. 글로 남긴 부분은 늘 생각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 한 편의 글은 하나의 생각으로 끝맺으면 좋겠지만, 섣불리 끝맺으려고 하면 쉽게 우스꽝스러워진다. ‘내게 열심히 손 흔드는 학생’에 대해 글을 쓰면, ‘교사와 학생과의 효과적인 소통방식’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교사로서의 나의 성장’이나 ‘방학이 지난 후 학생들의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 전개되든, 지금 한 생각만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어쩌면 앞서 쓴 완결이라는 표현이 모호할 수도 있겠다. 차라리 결론이라고 하는 게 적절하겠다. 어떤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던, 결론으로 내닫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 차근차근 생각하다 보면, 결국 모습을 이루게 된다. 그게 내 생각이다. 글이 생각의 과정일 때에만, 계속 글을 쓸 수 있다. 막힘없이 쓸 수 있다는 말은 막힘없이 생각해내는 힘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니 막힘 있는 글을 쓰는 것도 좋다. 생각이 막힐 때, 그걸 뚫고 나가기 위해 더 골몰하게 되니까. 내 생각의 힘은 자랄 것이고, 내 글도 그만큼 나아지지 않을까.

그 학생은 나를 왜 그렇고 환대하는 것일까? 내일 만나면 나도 열심히 두 팔 흔들어 줘야지.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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