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고 가족들과 산책을 나갔다가 귀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집을 나서서 100걸음을 채 디디기 전에 아내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래도 나선 걸음 그냥 들어올 수는 없다. 껴입은 옷이 아까워서 더 걸었다. 아들은 축구공을 가지고 나와 나에게 가끔 패스를 했고, 딸은 줄넘기에 킥보드까지 들고 왔다. 목이 허한 딸에게 내 옷을 벗어 입혔다. 서부청사 쪽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털모자를 쓰고 나갔어야 했는데, 귀가 차가웠다. 마치 얼음 배게에 모로 누운 것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귀가 차가워졌다. 나무에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의 반대편에 가지가 더 많고 풍성한 지 알 것 같다. 가지를 내기는 다 냈는데, 바람에 가지가 떨어져 나가 버린 것 아닌가 싶었다.
나무들은 추운 겨울이 되면, 자기 안을 일종의 아미노산으로 채운다고 한다. 당도를 높여 자기 안의 물이 얼지 않도록 하는 것. 그렇게 견딜 수 있는 기온은 어느 정도일까. 나무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안다라는 단어는 굉장히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 같지만,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위험을 인지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뿌리를 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는 식물들은 자기 자리에서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최고의 전문가가 아닐까. 몸뚱이가 타버리더라도 씨앗을 남겨 자랄만한 때를 기다린다. 알량한 인간만이 전지전능한 척하고, 안다는 단어를 인간 이성에만 주로 사용하려는 게 아닐까. 음. 네 발로 돌아다니는 동물에게도 안다는 단어를 쓰기는 하는구나.
저녁에 어묵이 들어간 국수를 해 먹어야지 생각하고 어묵을 사서 모두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고 좀 들어가 있으면 좋겠다 싶지만, 그건 사치다. 집 안에서 아이들이 없는 곳으로 몸을 숨기는 건, 혼자 쉬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아내도 나도 그런 시간을 많이 가지지 않는다. 결국 거실에서 서로가 서로를 상대한다.
딸과 어제 택배로 온 티젠 제주녹차 세작을 꺼냈다. 녹차는 어린잎으로 만든 것일수록 맛이 깔끔하고 값도 비싸다. 그 순서는 작설 - 우전 - 세작 - 중작 - 대작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티백으로 된 현미녹차에 익숙해서 그게 녹차맛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전을 마셔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깔끔하고 고소할 수가 없었다. 물론 오래되어 정확하게 그 맛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티젠은 대형 회사는 아니지만, 내 친구가 일하는 회사라 눈여겨보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친구를 만났는데, 작년에 BTS의 정국이 티젠에서 만든 콤부차를 즐겨 마신다고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서 말을 했다고 한다. 광고를 요청하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자신이 즐기는 것을 팬들에게 공유한 것. 덕분에 회사 매출이 엄청 뛰었었다고. 아무튼, 세작은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 않아서 나는 세작으로 주문했다.
딸은 어린이집 다니면서 아침마다 차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나는 왜 몰랐을까. 아무튼 딸은 찻잔을 받는데도 익숙했다. 아내가 결혼할 때 교수님 한 분으로부터 받은 다기를 꺼냈다. 차걸음망이 없지만, 그건 다른 찻잔에 쓰던 게 있어서 차를 마실 준비는 얼추 되었다. 딸은 다관(차를 우려내는 주전자)을 혼자 잡고 차를 따라 마셨다. 여러 번 따라 마시고 나에게도 따라줬다.
커피는 딸과 함께 못하지만, 녹차는 가능하니, 딸과 함께 하기에 좋은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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