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노인과 바다를 읽어 주고 있다. 딸을 재우면서 늘 옆에서 나는 책을 읽는다. 딸은 잠을 자고 싶지 않아서 내곁으로 고개를 밀고 내가 뭘 하나 본다. 나는 거듭 누우라고 눈을 감으라고 한다. 그러다가 가끔 내가 읽고 있던 영어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엊그제부터는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있는데, 내가 딸에게 책 읽어줄까 했다. 그랬더니 좋다고 해서 책을 골랐다. 6살 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그래도 좀 나오는 책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인과 바다'라는 책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너무 유명한 책, 너무 재미있다는 영화에는 손이 가지 않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 베스트셀러를 그 베스트셀러가 한창일 때 읽어본 적이 없다. 노인과 바다는 내게 '너무 알려진' 책 취급을 당하며 계속 순위를 다른 책에 내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딸에게 읽어주는 데, 초반부터 책에 빠져든다. 모든 면에서 마음에 든다.
대개 소설을 읽을 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그 세팅에 적응을 해야 한다. 300매 소설이라면 50쪽은 지나야 대강의 세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노인과 바다는 다르다. 노인과 소년을 제외하고는 인물이 별로 없다. 두 사람이 처한 환경이라는 것도 제법 빠르게 이해 된다. 이 둘 사이의 관계에 오로지 집중하게 된다. 그 점이 좋다. 결국 노인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서 빠른 속도로 읽기가 어렵지만, 우선 노인과 소년의 모습을 읽어나가는 일은 즐겁다. 옆에서 노인을 걱정하는 소년에게 감정이입하기도 하고, 무심하게 소년을 보살피며 꿋꿋함을 유지하는 노인의 모습도 좋다.
불안한 사건이 일어날까봐 겁이 나면 나는 가끔 영화를 멈추기도 한다. 아마도 '왕좌의 게임'이었던 것 같다. 너무 잔인한 싸움, 예상되는 한 인물의 고난을 감지하면 화면을 멈춘다. 가끔은 아예 화면을 끄고 다른 짓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며칠 후에 이어본다. 그저 예상되는 고난을 잠시 지연시키는 것이지만, 너무 많은 감정적 동요를 하지 않아도 되어 좋다. 편리한 전략이기는 하지만 진도가 느리다. 노인이 고기 잡이를 준비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자주 멈추어 이 책을 천천히 읽고 싶어진다. 노인이 처하게 되는 어려움이 무엇이든, 커튼을 열고 나타나려는 그 사건을 나는 커튼을 붙잡고 막아서려 하고 있다.
현실에서도 가끔 내 실수로, 혹은 다른 사람의 실수로, 나에게 닥칠 난처함, 다른 사람에게 닥칠 어려움을 장기의 한 수 앞을 예상하듯 아주 뻔하게 예상할 수 있게 될 때가 있다. 잠시 '시간을 멈추어' 마음의 준비를 더 하고 싶다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내 인생의 찰나를 잡아낼 수는 없으니 드라마를 볼 때, 책을 읽을 때라도 내 마음대로 멈출 수 있다는 건 제법 괜찮은 전략이 아닌다. 멈춰봐도 결국 바뀌는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 삶은 내 것이니 좀 더 신중해야 한다. 한 수를 보고 움직여서는 될 일이 아니니, 여러 수를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
딸은 내가 채 3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잠들었다. 달이 잠들면 나는 조금만 더 책을 읽다가 멈춘다. 혼자 읽는 책이 아니라 좋다. 노인에게 어떠한 고난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고 열심히 바란다. 고난이 예정되어 있고, 책에 이미 박제되어 있음에도 그렇게 바래본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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