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아빠로살아가기

추석의 실패

타츠루 2021. 9. 21. 22:58

이틀 전에 부산의 문구점에서 사준 작은 수첩. 딸은 거기에 우리 가족 이름을 쓰겠다고 했다.
먼저 딸은 자기를 시작으로, 엄마, 아빠, 오빠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부산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을, 그 다음에는 진주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을, 그리고 고모, 고모부, 사촌들 이름, 삼촌, 숭모, 사촌 이름까지. 딸이 그렇게 이름을 쓰고 있으니, 이참에 가계도를 그려 보는 게 어떨까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작은 수첩에 달린 열쇠 잠그고 여는 걸 알려주느라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오빠 보다도 이쁘게 글을 쓰는 딸

내 어머니는 8남매 중 셋째고 덕분에 어린 시절에는 많은 사촌들을 만났다. 서울도 가고, 인천도 가고, 강원도에도 갔다. 비슷한 또래의 다양한 사촌을 만나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새마을호를 타는 게 곤혹스러웠고, 시외버스를 한 시간 타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길은 멀미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사촌들을 만나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촌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멀리 있는 사촌일수록 더 그렇고, 외사촌일수록 분명히 그랬다. 나랑 동갑이 외사촌은 군대 가기 전에 만나 둘이서 술을 마신 이후로는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 때에도 아주 오랜만에 봤었는데, 그냥 오랜 친구처럼 좋았다.

형제야 집을 떠나 출가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보게 되지만 사촌은 그렇지 않다는 걸 경험하고, 나는 우리 아이들이 사촌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고 바랬다. 아내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좀 무리가 되더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도 가고, 인천에도 갔다. 이제 설도 명절도 예전의 그 성대함을 잃어서 그 기간 동안 가족들을 다 만나는 일도 이제는 없다.

오늘이 추석이지만, 나는 큰집으로 가지 않았다. 큰아버지, 아빠, 삼촌이 모여서 차례를 지냈겠지만, 나는 그 자리에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물론 그 이전부터겠지만, 기억나는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차례 지내고 제사 지내는 것을 보면서, ‘조상을 모시는 의례’가 어떻게 변하는 지 나는 볼 수 있었다. 특히 가세가 기울면 그만큼 큰 변화가 생겼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시고 모두 살림이 “살만 할 때”에는 음식도 거하게 차렸고, 서로 웃는 일도 많았다. 아이들이 어려서 그랬을 수도 있고, 모두들 젊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벌초는 직접하고, 성묘도 반드시 갔다. 밥은 모두 둘러 앉아서 먹고, 추석 명절에는 할머니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주변 친척들 집으로 찾아가 따로 인사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채 30년이 되기도 전에 추석의 모습은 싹 바뀌었다. 코로나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코로나는 변화의 시간을 줄인 것 뿐, 방향을 바꾼 것은 아니다.

더 빠르게 제례의식에 대한 변화가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설이며 추석 명절을 어떻게 지내면 좋을 지 더 빨리 연구하고 방향을 제시 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각 가정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제사상 음식의 종류나 절하는 법에 대한 시시비비도 많아서 그걸 국가에서 정리해주기도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설과 추석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야 할까도 모두가 고민했어야 했다.

산 사람들이 모여서 즐거울 수 있도록 방향을 틀었어야 했는데, 이제는 끌려가다 시피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나 싶다. 묘는 되도록 정리해야 하고,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벌초할 사람이 없다. 벌초를 해야 한다면 사람을 사서 맡기기도 한다. 제사도 미리 정리했어야 하는데, 누구인지도 모르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차례가 끝나면 음식싸서 각자의 집으로 가기 바빴다. 내가 겪은 우리 집과 다르게 여전히 즐거운 추석을 맞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먹지도 않는 데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힘들다. 음식을 준비할 사람도 없으니, 돈을 내고 사야 한다. 돈을 주고 사는 음식에 내 정성이 들어가는 지는 의문스럽다.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여성에게는 음식을 맡기고, 남자들은 절만 하는 방식을 빨리 개선했어야 했다. 이제 엄마는 차례를 거들러 큰집으로 가지 않는다. 이미 몇 년 전에 엄마는 “할만큼 했다.” 라고 했고,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내년의 설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 나는 우리 딸이 되도록 오랫동안 가족을 생각하면, 우리집 네 식구에, 할아버지 할머니에, 고모, 삼촌까지 생각하면 좋겠다. 늘 그렇지는 않더라도, 명절이 되면, 생각하는 가족의 범위가 넓었으면 좋겠다. 가족주의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그저 이유없이 나와 맺어진 사람들이 제법 세상에 있고, 나에게 이유없이 친절할 분명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년 설에는 가족들을 모두 볼 수 있을까. 우리 엄마, 아빠에게서 시작되는 구성원들까지만 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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