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어쩔 수 없이 교과서를 사용해야 하지만, 교과서만큼 다루기 어려운 텍스트도 없습니다. 교과서가 자체의 문제가 아니지만, 교과 성적이 중요해지는 만큼 평가의 자료로서의 교과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내신시험에 들어가는 만큼, 학생들은 학교에서 나간 진도만큼 학원이나 과외를 통해서 재학습하게 됩니다. 복습이라면 문제가 적을 수도 있지만, 시험 범위가 안내되기 전부터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부분을 선행학습하고 옵니다. 그다지 어렵거나, 흥미롭지도 않은 교재를 두 번 배우면 누구라도 수업에 집중이 안되지 않을까요? 정부는 ‘선행학습금지법’ 이란 것을 재정했지만, 그 법의 감시를 받는 대상은 오로지 학교 뿐입니다. 아이러니하죠.
게다가 내신 시험의 기능은 학생들의 학습을 평가하는 데 초점이 있어야 하지만, 대입을 위한 내신등급 산출을 위한 기능에 더 충실합니다. 특히 상위권 학생들을 1등급과 2등급으로 구분하려면 난이도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은 지문(교과서)으로 난이도를 높이려면, 문제가 지엽적(한마디로 쪼잔한)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학원이나 과외를 통해서 몇 년간의 기출 문제나 예상 문제를 풀고 또 풀어서 교과서를 외우는 수준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양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실력이 늘거나 성적이 나오지 않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부교재를 사용해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저는 수업 시간을 이용해서 교과서 진도도 나가고, 부교재 진도도 나가는데, 수능기출 지문을 모아놓은 부교재도 그닥 재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교과서는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고, 수능 지문은 짧은 데 너무 학생들의 관심과 동떨어진 소재를 다루는 경우가 많고, 문장이 길고 너무 복잡한 경우가 많아 학생들이 힘들어 합니다. 소위 “우리말로도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부교재 수업 준비도 상당히 신경이 쓰입니다.
얼마전 학생들과 공부했던 지문은 ‘전쟁과 전쟁을 정의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적의 개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너무 짧은 글 안에 추상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서 쉽지 않은 지문이었습니다. 이럴 때 저는 우선 원문 텍스트를 찾아봅니다. 위 지문의 경우에는 위에 한 줄, 그리고 같은 문단 속 맨 아래 세 문장을 출제자가 마음대로 지웠더군요. 마지막 세 문장이 있었다면 조금은 더 구체적인 지문이 되었을 텐데 아쉬웠습니다.
제 수업 준비의 고민은 적의 개념과 전쟁의 모습, 민간인 살해와 적군에 대한 살상을 어떻게 학생들에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어떻게 학생들의 관심을 이 텍스트의 내용에 집중시킬 수 있을것인가가 바로 고민이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책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전쟁에 대해 다룹니다. 그리고 전쟁 상황에서의 포로에 대한 처우 등에 대해서도 생각을 밝힙니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한 끝에,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상황을 던지고 수업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아주 잘 훈련된 군인이라 칩시다. 전쟁터에서 한 건물의 모퉁이를 돌았어요. 적군이 여러분에게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적을 죽이겠어요?
왜 길을 가는 행인을 죽이면 처벌받고,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면 처벌 받지 않나요? 길을 걷다 살해되는 20대 청년이나, 전쟁터에서 죽게 되는 20대 청년이나 모두 죽고 나면 누군가의 아들, 오빠, 남자친구 이지 않나요?
학생들은 질문에 흥미를 보였습니다. 모든 질문을 유용하지만, 효과있는 질문은 정답이 없는 질문, 선생님이 답을 쥐고 있지 않은 질문, 시험에 나오지 않을 질문입니다. 제 목소리를 들은 학생들은 모두 생각에 잠겼습니다. 학생들에게서 답을 얻어야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얻어내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준비해간 한가지 질문을 더 합니다.
아까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여러분이 적군을 만났습니다. 총을 쏘려는 찰나, 적군이 무기를 모두 버리고, 항복하겠다고 합니다. 이때, 적군을 총으로 쏘아도 될까요? 안될까요?
학생들의 얼굴에는 각기 다른 답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업의 소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오늘 배우게 되는 지문이 바로 이 전쟁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전쟁에서 발생하는 살인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 지 찾아보도록 합시다.
수업을 마치고 나서, 학생들에게서 Learning log를 받았습니다. 제법 많은 학생들이 ‘전쟁’과 ‘살인’에 대해서 완전히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썼습니다. ‘어렵다’ ‘못 알아듣겠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수업 시간 동안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루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지만, 경솔하거나 가벼운 태도로 수업에 임하는 학생은 없었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읽든 어떤 언어로 읽든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학생들이 그 텍스트를 통해서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인 것 같습니다. 교과서의 목차를 살펴보면, 학생들이 관심 가질 것으로 보이는 주제나 학생들이 살아가게 될 사회에 대한 것이긴 한데, 그렇게 교실상황에서 사용하게 될 텍스트로 준비되었기 때문에, 너무 가공된 음식 같은 뭔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다루게 되든, 그게 학생들의 삶과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게 정말 중요하구나 생각했습니다. 문형의 어렵고 쉽고는 아주 중대한 문제가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수업을 통해서, 영어교사로서 좀 더 열심히 다양한 텍스트를 읽어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로써 뉴욕타임스 구독은 계속 갱신해 나갈 것이고, 킨들로도 더 많은 책을 읽어야 겠습니다. 신경써서 흥미로운 부분이나 재미있는 영어표현 등은 밑줄 그으며 수집하고 있었는데, 문단 단위로 수집해 놓고, 교실에서 텍스트로 사용할 방안을 생각해야 겠습니다.
시험 범위를 정할 때 늘, “선생님이 말해주고 잠시 쓴 것도 시험 범위다. 수업에 열심히 집중하고 참여한 학생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목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읽어주고 해석해주지 않은 외부지문을 시험에 출제하기도 합니다. 그때는 수업 시간에 다룬 중요한 어법을 담고 있는 지문이거나, 수업을 통해서 내용을 전달한 소재에 대한 지문입니다. 수업 시간에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고 질문하면, 처음 보는 지문도 잘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수업의 목표입니다. 좋은 글의 래파토리를 쌓아 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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