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아빠로살아가기

아빠에게 아빠가 되어줄게.

타츠루 2021. 11. 26. 23:16
아빠 병상

 

1교시. 엄마의 전화를 받고, 최근 들어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셨다는 외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데자뷰를 경험하는 것처럼, 아침에 울리는 발신자 ‘엄마’의 전화는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아빠 사고 났데.’

 

그 순간,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을 모두 머릿속에 꺼내보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어떻게 처리 할 지 생각하고, 지금 부산까지 가거나 아빠가 이동하고 있다는 진해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를 생각했다. 늦잠을 잔 덕분에 오늘 아침 출근은 차로 했고, 기름이 없으니 가득 채우고 출발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일하는 곳은 진해에서 가깝고, 아빠를 실은 구급차는 일단 진해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엄마는 회사에서 나왔으나 차도 없이 진해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걸릴테니, 진해에 있는 이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모가 소식을 전하고 엄마는 그 소식을 듣고 나에게 말해줬다. 뚝뚝 끊어진채 들어오는 엄마가 전하는 소식으로는 나는 그 ‘사건’이 어떤 모양새인지 정확히 머릿 속에 그리기가 힘들었다. 아빠가 오른 발을 많이 다쳤고, 그 많이 다친 정도는 발을 아예 못 쓰게 될 수도 있는 정도였다.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는 듣지 못했다. 출장 중인 교감선생님에게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으셔서, 교장 선생님에게 말하고 짐을 챙겼다.

 

진해로 가고 있는 사이, 아빠는 다른 엠뷸런스를 타고 부산 세일병원으로 향했다. 나도 진해로 가려고 마산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갔다. 그리고 세일병원으로 향했다. 다루기 어려운 골절을 잘 하는 병원이 두 개라는데, 세일병원과 센텀병원이다. 아빠가 세일병원으로 가자고 했다고 했고, 나도 그리로 향했다. 의사인 아는 이웃에게 물으니, 부산에 있는 병원은 잘 모르지만 일단 3차병원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아대병원으로 가면 되겠다 생각했지만, 진해에 있는 응급실에서 동아대로 연락해 본 바, 미세접합의 경우 자기 병원에서는 다룰 수 없다고 했단다.

 

아빠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일단 원무과에 접수를 하고, 이전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 지 확인했다. 그리고 아빠는 응급실에 도착. 환자 보호자는 한 명만 병원으로 갈 수 있다고 해서, 엄마는 나보다 먼저 병원에 왔지만 병원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들어가서 아빠가 어떤 상태인지도 확인하고, 밀려드는 정보들은 노트에 기록으로 남기고, 가끔 밖으로 나와 엄마를 봤다.

 

아빠의 오른쪽 발톱은 거의 재생 불가능한 상태라는 게 의사의 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반응을 보일 수는 있을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빠도 아직 정신이 없었고 와중에 아빠는 통증도 계속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수술을 해야 할 게 분명했으므로 아빠는 수술 준비를 위한 검사를 모두 했다. 검사는 끝나고 수술할 의사가 왔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단어를 들었다. 발의 일부를 절달하거나, 복숭아뼈 위로 절달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이런 말까지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상상도 했는데, 그 말을 실제로 들으니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가 피할 수 없는 나를 붙잡고 뜨거운 물을 붓고, 쉬지 않고 얼음물을 붓고, 온 몸에 있는 나의 피를 모두 빼어 내 몸을 모두 세척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응급실 침대 하나에 기대어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몸을 제대로 펴고 서있을 수가 없었다. 누구도 볼 수는 없었겠지만, 몸에서 식은 땀이 났고 나는 아빠에게 들킬까봐 걱정이 되었다. 나는 응급실 침상 옆으로 있는 커튼을 좀 치고 아빠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빠는 내 아빠 같지 않았다. 마치 내 아들 같았다. 내가 지켜줘야 하는 데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아빠의 머리를 쓰다듬는 데, 아빠 얼굴을 보니 울면 안될 것 같았다. 아빠는 울음을 참으려고 눈을 감았다. 아빠에게 기대어 아빠를 안아주는 데, 눈물이 나고 말았다. ‘너까지 울면 어떡해.’ 나는 절대 울지 않으려고 했는 데 조금 울고 말았다.

 

뭐라 결론 낼 수 없는 데, 의사는 답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다. 아빠와 나에게만 표정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싹 표정을 지운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나는 언뜻 아빠의 으스러진 발을 보게 되었고, 아빠는 왜 그런지 ‘미안해, 아들.’ 이라고 했다. 나는 미안하다는 아빠에게 미안했고, 안아주고 만져주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아빠라는 꽃이 가엾었다. 마치 입을 떨어뜨리며 아파하는 것처럼 아빠는 아프고, 나는 아무렇지 않아 미안했다. 아빠는 내게 돌봄을 받을 때가 되었는데, 나는 아빠에게 아빠가 받을 만한 돌봄을 준 적이 없는 것 같아 나는 미안했다. 아빠는 찍어야 할 사진이 있었고, 밖에 기다리는 엄마도 잠시 봐야 했다.

 

엄마를 데리고 가서 칼국수를 먹었다.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배부르게 먹지라도 않으면 생각도 못할 것 같았다. 김밥까지 시켜서 먹었다. 엄마에게 어떻게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는데, 의사에게 들은 말을 모두 하자니 도저히 엄마가 못 견딜 것 같았다. 일단 배불리 먹여야 하고, 일단 엄마는 집에 가서 좀 쉬어야 하고, 다시 만나면 이야기 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를 집으로 보냈다. 한 명만 지정보호자가 될 수 있고, 엄마가 보호자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가 오기전까지 나는 최대한 병원에 있으면서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아빠와 결정해야 할 것을 같이 결정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모두 쓰지는 않았지만, 틈틈히 휴대폰을 꺼내어 알게 되는 사실, 챙겨야 하는 것들을 썼다. 그리고 누나와 동생이 함께 들어와 있는 채팅방에 소식을 계속 업데이트 했다. 당장 부산으로 와서 보고 싶다고 하지만, 병원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 위드 코로나 라지만, 사람이 많이 오면 올수록 좋은 곳만 사람에게 열리고, 사람이 적을 수록 편한 곳은 닫힌 문을 열지 않고 있다. 병원은 닫힌 문이고, 환자 이외에는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말하기 힘들었지만,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에 대해서 누나와 동생에게도 이야기 해야 했고, 일단 이야기 했다.

 

의사에게 최악의 경우에는 절단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하고, 일단 오늘 수술은 도저히 살려낼 수 없는 피부를 정리하는 수슬을 하기로 했다.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수술을 기다렸다. 응급실에서 기다림이 길어지다가 입원병동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또 한참을 기다렸다. 아빠는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누가 등뒤를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몸을 움츠리며 아파했다. 나는 그저 저 아픔이나 가시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빠는 한 시간 반 수술을 하고 왔고, 수술이 끝나고 따로 의사를 만나지 못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척추마취를 한터라 아빠는 아직 하반신으로는 감각이 없었다. 마취가 깨면 고통이 심해지겠지. 간호사는 무통주사가 달려 있고, 3일을 가는데, 통증이 심하면 스위치를 누르면 15분 정도는 좀 더 많은 양이 들어간다고 했다. 그리고 가슴에는 마약성 진통제라며 패치처럼 생긴 것을 붙여주었다. 산소를 넣고 아빠손가락에 Spo2를 측정하는 기구를 달았는데, 손발이 찬 상태라 수치 측정이 어려웠다. 아빠는 추위를 호소했고, 이불을 두 개 덮고, 전기로 데우는 핫팩을 가슴에 얹고서야 체온을 찾았다. 그리고 호흡도 찾고 산소포화도 수치도 좋아졌다.

 

그리고 엄마가 오고, 나는 진주집으로 왔다. 점심 식사 이후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진양휴게소에 들러서 늦은 저녁을 혼자 먹었다. 돈까스에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지만, 김치찌개, 비빔밥, 육계장만 가능했다. 김치찌개를 벌컥벌컥 떠먹고 집으로 왔다. 내일도 아마 모래도 병원에 가볼거라, 아내는 그냥 부산 집에서 자라고 했지만, 진주집으로 오고 싶었다. 내 쉼은 여기에 있다.

 

아빠랑 같이 있으면서는 아빠가 고통스러워 하는 얼굴을 볼 수도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었다. 지금 침대에서 오늘 하루를 정리하는데, 아빠를 보고 있지 않으니 아빠의 통증을 느낄 수가 없어서 내가 밉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세상이 잘 돌아가는 일이 고통스럽다. 아빠가 최대한 아빠 발의 많은 부분을 찾고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누구든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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