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력
어젯밤 아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능력을 갖고 싶어?
- 뭐든 잘할 수 있는 능력.
- 아니, 한 가지만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말이야.
- 설득력.
나는 잠시 생각했다. 왜 설득력을 갖고 싶은지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훌륭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은 이제 세상과 싸우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은 게 많아지는데, 그것을 가로막는 것도 많아지고 그런 것들을 알게 되었고, 그것들을 모두 견뎌낼 수 없게 되었다. 싸워서 이기면 패자가 생긴다. 그러니 설득하면 좋다.
나도 중학생 때나 고등학생 때에는 다른 사람, 정확히 친구들을 잘 설득한다고 생각했다. 판매사원이 된 마냥, 내가 사놓고 마음에 안들었던 다이어리를 친구에게 성공적으로 되팔기도 했다. 늘 말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것도 그런 생각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리고 그저 말을 잘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사람이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초등학생 때나 중학생 때보다 나이 든 사람들을 동료로 대하고 있고,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멀어진다. 더 다양해진다. 우주의 별들은 점점 멀어지고 있지 않나. 사람이 나이 들면 그렇게 멀어지는 별들이 된다. 그러니 내가 예상하는 대로 내가 기대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을 때가 많다.
설득에 실패하는 경우는 아주 많고, 협의에 이르는 것도 매우 어려울 때가 많다. 최악의 경우는, 설득도 협의도 실패하고 감정까지 상하게 되는 경우다. 상대만 아니라 내 감정까지, 아니 상대의 감정은 모르겠고 내 감정부터. 그리고 자주 '왜 내 진심을 몰라주지?', '저 사람은 왜 저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말을 하지'라고 생각하게도 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으면서, 인간도 저렇게 페로몬과 더듬이를 통해서 거의 완벽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다. 한 개체와 다른 개체가 페로몬으로 정보와 감정을 나누면, 이는 나눈다기보다는 새로운 백업이 아닌가. 이런 정보의 통일은 싱크 sync(동기화)라고 불러야 한다. 이때 각 개체는 개별성을 뛰어넘어 전체성을 유지한 일부가 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페로몬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있어서 실패한다.
언어는 불완전하고 그 시스템 자체의 부족한 부분이나 사용자의 잘못으로 오작동하기도 한다. 우리는 피상적으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서로 의미가 통하는 부분 상식이란 영역을 살펴보면, 언어를 통해 우리가 이해하는 범위도 딱 그만큼 정도일 것이라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전기제품을 쓰고 나면 코드를 뽑아놓는 게 상식인데, 그냥 두는 게 상식인 사람도 있다. 상식은 두루뭉술한 모양을 갖고 있지만 늘 협의의 대상이며, 고로 늘 변화한다. 언어 사용이라는 협의된 영역에 있어서도 그렇다. 언어의 사용 방식이 다르다는 점은 한국어와 영어처럼 다른 언어일 때 쉽게 비교할 수 있다. '시간 좀 죽인다'라는 표현이나 'kill some time'을 보면, 언어는 달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시간을 생각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에 '목을 빼고 기다린다'를 1:1로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은 없다. 그와 유사한 표현을 외워서 준비해야 비슷한 느낌을 간신히 전달할 수만 있다.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말하는 방법을 배우지만, 그게 학교 안의 영역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삶에서 좋은 말하기의 방법을 연습하고 확장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곧잘 사실과 의견을 뒤섞어서, 의견을 사실로 둔갑시킨다. 사실 명제를 가치 명제로 만들어 버린다. "전기제품 쓰고 나면 코드 뽑는 게 당연하지"
부탁과 거절에 서투르고,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이 겪는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상대에게 내 감정과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익숙지 않다. 그저 "저 사람 이상하다"라든지, "너 때문에 너무 화가 난다"로 끝나버리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감정과 욕구도 살펴서 그걸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아들은 어떤 상황을 겪고 나서 설득력을 갖고 싶은 초능력이라고 말했을까. 그저 친구가 가지고 있는 마음에 드는 포켓몬 카드를 아들이 갖고 있는 필요 없는 카드와 바꾸기 위해 설득력이 필요한 것이겠지만 아마도.
'일상사 > 아빠로살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경을 잃어버린 아들에게 비폭력대화의 방식으로 마음 전하기 (0) | 2021.11.22 |
---|---|
Not with 독감 (독감 접종기) (2) | 2021.11.11 |
데자뷰의 순간 : 내 책장에 접근하는 아들 (2) | 2021.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