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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관련

소통가능한 식물과 불통가능한 헐크

엄마집 식물들

애초 되돌려 받을 마음이 없는 관계란 얼마나 좋은가 싶다.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 이승희 산문

준 것은 잊고 받은 것은 기억해야지 늘 애쓴다. 하지만, 못난 인간이라 가끔 준 것을 기억하고 받은 것은 기억에서 희미해질 때가 있다. 그러다가 책에서 저 문장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부터 나를 노려보며 나의 인사를 무시하는 학생 한 명이 떠올랐다.

교사의 역할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교육이 무엇이냐에 대한 정의보다 더 많은 답이 가능할 것이다. 교사마다 다른 답을 가지고 있고, 학생마다 다른 기대를 할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교사의 역할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도 어렵다.

우선 나라가 정하는대로 교과 수업을 하고, 성적을 내고, 대입을 위해서 생활기록부를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 이건 최소한. 최대한으로 하자면, 그렇다, 끝이 없다. 친구처럼 다가가 말을 붙이기도 하고, 부모처럼 걱정하기도 하고, 선배처럼 이끌어 주어야 하기도 한다. 확인은 하되 일단 믿어야 하고, 학생의 현재보다는 가능성을 믿고 학생이 자신의 잠재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러면서도 학생에게서 어떤 보답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결국 보답을 받게 되더라도 말이다. 보답을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기대해서는 실망과 좌절에 빠지지 않을까.

Give and take 의 위험함은 어디에 있을까? 받을 것을 기대하고 주게 될 수도 있다는 데에 있다. “내가 이렇게 해줬는데, 너는 그 따위야?”라는 태도라면, 거래도 어떤 차이가 있을까. 더욱이 학생과 교사는 동등한 관계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어쨌든 교사에게서 학생으로 압력이 존재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현재의 고단한 여러 문제들, 교사를 힘들게 하는 여러 가지 사건 사고나 여론들을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반 이상의 학생은 교사의 통제에 순응하는 편이다.

되돌려 받을 마음이 없는 관계는 주기는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순간에 정성을 다하는 게 아닐까. 저자는 식물에게 마음을 쏟음으로써, 식물은 주려고 한 적도 없는 위안을 받는다. 내가 마음 쓸 곳을 찾는 것부터 일종의 연결이 된다는 말이 와닿는다. 학교에 가면, 내 마음 가져다 댈 곳이 많다. 하나하나 챙기자면, 내게 무언가 되돌려 줄 것 같지 않지만, 내가 마음 쏟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처럼 쉽다면 모두가 쉽게 교사 생활 하겠지. 하지만 안 되는 건, 기대하기 쉽게 때문이다. 누군가의 성장을 기대하려면, 믿으려면, 그 성장을 반드시 묵도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일 년이 될 수도 있다. 영영 기다려도 한 학생의 성장을 끝끝내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때의 실망은 쓰다.

어쩌면 식물이란 애초 공간이나 상호작용의 대상이 아니라, 기대를 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게 되려 쉽지 않을까. 젖먹이의 웃음만 봐도 부모는 새벽 육아의 노동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웃음이라는 작은 보상이 충분한 보상이 되기도 한다. 젖먹이를 상호작용의 능력을 가진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학생에게 기대하지 않고도, 식물을 가꾸듯 마음을 주려면, 상호작용 가능의 대상으로 보지 않아야 할까. 내 논의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학생들은 마치 헐크처럼, 지킬박사처럼, 소통가능한 존재와 막무가내로 해를 끼치는 존재 사이를 오가기도 한다.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해주지 않고서 이빨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를 보호하면서도 학생들을 보호하고, 틈을 봐 소통하면서도 달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늘 깊고, 답을 찾으려 질문을 꺼내봐도 좋은 질문은 쉽게 동나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