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외면일기

내 생일에 피는 식물

타츠루 2019. 4. 12. 09:56

내 작은 정원 

 

09:35

 

아이들을 보내고 자리에 앉으면 늘 이 시간이다. 오늘은 커피를 만들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조금 있으면 수영을 하러 가야 하고 그러니 조금 시간에 쫓기는 마음이 된다. (요즘에 '~한 마음이 된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 시간은 아침 기록을 한다. 아이들을 보내면서 있었던 일도 기록하고 하루 중에 무엇을 해야 하나 기록도 한다. 

 

저기 저 사진이 내가 가진 정원의 전부다. 여기에 나오지 않은 녀석은 상추다. 수영을 마치고 오는 길에 보니 모종을 파는 곳이 있어서 가봤더니 여러가지 채소들도 있었다. '제일 키우기 쉬운 게 무냐?' 여쭈니 상추는 물만 주면 된다고 해서 데리고 왔다. 분무기로만 물을 줬는데, 픽픽 힘이 없어서 다 마신 2리터짜리 플라스틱 우유통을 잘라서 물에 완전히 잠기게 해 뒀다. 설거지를 하는데, 상추를 보면서 하니 위안이 되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아무튼, 식물'을 보면 저자(임이랑, 최근에 다 읽은 이슬아 작가의 수필집에 친구 중 하나로 자주 등장)는 불안과 우울을 자주 느끼는 데, 집 안을 채운 식물들에게 위안을 받는다. 나는 저자만큼 불안이나 우울을 느끼지는 않지만, 식물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나는 차라리 식물의 '꿋꿋함'에서 위안을 얻는데, 매일 지켜보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화분을 돌리면 자기 고개도 돌려 햇볕을 찾는다. 꽃을 피우고, 몸을 움직이고, 그런 식물을 보면 '움직임의 자유'라는 게 그것 자체로 식물에 비해 인간이 더 가진 월등한 자질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그 움직임의 경로를 생각하면 그 규모면에서 식물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오늘 딸은 유치원에 '아무 옷이나' 입고 가는 날이었다. 딸의 옷을 고르는 게 어렵기도 하고, 아내에게 무언가 일을 떠넘기는 방법이기도 한데, 딸에게 엄마와 옷을 고르라고 한다. 어제 밤 딸은 아내와 옷을 고르지 않았다. 아침에 그걸 알게 되었고, 딸은 당혹스러워했다. "엄마한테 말했는데...." 아빠랑 고르자고 하면서 우선 밥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약을 싸서........ (유치원 가방에 넣지 않았다. 는 걸 지금 알게 된다.), 양치질을 시키고 세수를 시키고. 화장실 간 사이 딸이 옷을 골라뒀다. 가오리랄까 뭔가 아방가르드한(이 단어로 설명해야 하는 스타일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소매의 윗도리에 딸의 옷장을 가장 많이 채우고 있는 쫄쫄이 바지 중 하나를 골라왔다. 양말은 얼마 전에 샀던 핑크양말 4종 세트 중에 하나다. (양말만큼은 늘 손으로 빨아야 한다.ㅠ) 

 

일단 윗도리를 입히고 나도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고 나왔는 데, 짜잔! 딸이 양말도 신고 바지도 입었다. 요녀석.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다. 나는 호들갑을 떨면, "대단해!! 대단해!!" 얼싸안아준다. 유치원생이 되기 전에 이미 바지는 혼자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능력이 있다고 모두 사용하지 않는 게 인간 아닌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는 다른 사람이 타주는 커피다. 옷도 다른 사람이 입혀주는 게 편하다. 유치원생이 되고서는 혼자서 옷을 잘 입지 않았다. 몇 번이나 실랑이를 벌이며 울려가기도 하면서 직접 입게도 하지만, 오늘처럼 산뜻하게 아무 징징됨 없이 옷을 입는 날은 흔치 않다. 딸 얼굴에 묻은 자랑스러움이 사라져 버리기도 전에 나는 더 딸을 칭찬한다. (딸, 다음 주 월요일에도 부탁해.)

 

스스로 해낸다는 건 기쁨이기도 전에, '나의 몸의 편함'과 직접 연결된다. 고로 기쁘기 전에 우선 '너무 고마워'하게 된다. 아등바등 성장하려는 딸을 보면 집에 와서 조용한 식물을 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애지중지 하면서도 꿋꿋하길 바란다. 내게 기대기를 바라면서도 혼자 해나가길 바란다. 내말을 고분고분 들으면 한이 없겠다 싶으면서도, 내 말 안 듣고도 혼자 잘해나가면 좋겠다. 아이의 성장은 폭발적인데, 부모의 역할 변화는 쉽지 않다. 천천히 나를 받아들여주고 나를 인정하며 키워준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글을 쓰는 사이 엄마한테서 문자가 왔다. 

"아들아 생일 축하한다  열심이하고 건강하게 가족들 모두 행복하게 멋지게 살아라 ♥♥♥한다 ~~ " 

얼른 답장을 보낸다. 

"엄마, 고마워. 낳아주고 길러줘서 고마워. 사랑해. :)"

 

엄마한테 느끼는 고마움은 이제서야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는 고마움 같다. 국민학교 시절 어버이날에 편지를 쓰면서도, 중학생 때 생일날 편지를 쓰면서도 생각했던 고마움은 막연했던 것 같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키우기 위해 한 일이 무엇인지 충분히 생각하지 않아서, 충분히 감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떤 부모도 '내가 노력한 걸 제발 알아주라.' 바라고 강요하지 않겠지만, 자식은 모두 부모가 나를 키우려고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참아냈는지 궁금해해야 하지 않을까. 감사하는 마음 전에, 그게 먼저이지 않을까?

나의 햇님은 어디에 있을까. 수영하다 찾을 수도 있고, 자전거를 찾으며 찾을 수도 있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찾을 수도 있다. 나는 누구에게 햇볕이 되어 줄까.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덜 찡그리고, 더 웃어줘야지. 다짐은 늘 저기 앞서 만 간다. 

 

#오늘은뭔가생일에어울리는글을쓴듯 #생일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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