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Instant blogging

남편과 집구석

타츠루 2021. 12. 23. 21:03

집구석 : '집안'을 잡아 이르는 말

90년대 드라마에서 '이 놈의 집구석, 아주 들어오기가 싫다 싫어.' 따위의 대사 속에 섞여 들려왔다. 집구석은 여자가 지켜야 하는 공간이거나 지켜내야 하는 공간이고, 가족들에게 오로지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공격의 화살은 집구석을 지키는(실제로는 맞벌이를 하느라 홀로 지키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로 향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아빠도 저런 대사를 몇 번쯤은 날리지 않았을까.

사랑이 뭐길래

이런 드라마에서 '집구석'을 들어보지 않았을까.

 

 

집에 들어오기 전이 바깥이라면, 그 바깥에서의 고된 정신적, 혹은 육체적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거머리처럼 따라붙은 그 피로를 다 떼어내고 집으로 올 수 없다. 집으로 들어오기 전 문을 열며 '얍, 밖에서의 일은 잊자.' 따위의 주문을 외운다고 될 일도 아니다. 거머리는 붙어서 사람을 더 지치게 하고, 집에서도 밖의 이야기로 서로를 지치게 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해서든 밖에서의 일이 너무 힘들지 않아야 좋다.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본가 집안에 태어났어야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지금 내가 김수행 교수님의 자본론 공부를 읽고 있어서다.

아내가 일하는 곳에서 갖가지 일이 일어나고 자주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 다행인 점은, 나는 내가 일하는 곳에서 일어난 일을 잘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경우가 많다. 아니, 그저 내가 운이 좋아서 내 바깥은 나를 배반하거나 나를 너무 착취하지는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아내 주변에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나고, 오늘은 아내에게 그 피곤이라는 거머리가 붙어 있다.

집구석이 이 되려면, 어떡해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타고나기는 3/4 정도 행복한 상태라면 좀 견디기 쉽지 않을까. 나의 정상적인 정서는 2/3 행복한 상태다. 대체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고 크게 기분 나쁜 상태가 오래 가는 경우는 별로 없다. 타고나기로는 1/2 행복한 상태였던 것 같은데, 많이 업그레이드되었다. 이건 모두 고민 덕분인데,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고민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무엇인가. 고민을 깊이 하고, 책도 읽다 보니, 나의 만족 수준이나 행복의 수준이 높아졌다.

happy day

누군가 힘들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이라도 더 힘을 내거나 힘이 난 상태로 그 사람을 도와야 하는 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두운 얼굴에 나도 어깨에서 힘이 빠져 나가 버린다. 잘못 집에 들인 거머리는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얼른 밥을 먹고, 세탁기를 돌리고, 샤워를 하러 들어간다. 촤르르. 얼굴도 박박 문질러 씻고, 조금 뜨거운 듯한 온도로 샤워를 하고, 마지막에는 차가운 물로 머리끝부터 식힌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기분이 나아져 있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여력이 나에게 부족하다면, 내가 나에게 먼저 공감해야 한다고 비폭력대화에 있더라. 공감이란 마른 샘에서 퍼올릴 수 있는 물이 아니다. 나에 대한 공감이 충분해야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하다. 나 자신에 대한 공감은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자기 만의 방법을 찾아야 하려나. 집 안에서 내가 해낼 수 있는 방법은 일단 샤워구나. 그리고 오늘 새로 사서 끓인 구수한 둥굴레차.

나는 한참 모자란 남편이라 자칫하면 '집구석에 들어오기 싫어.'라고 독백해 버릴 수 있는 놈이다. 그러니,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와 내 주변을 잘 돌봐야 한다. 온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건 누가 이미 많은 수고를 했다는 말. 집에서 편히 쉴 수 있으려면, 집에 사는 모두가 집안을 가꾸어야 가능하다.

일단, 다시 둥굴레차 한 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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