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김장을 담글 때는 꼭 부산 집에 가려고 했다. 절인 배추를 건져내서 물을 빼는 걸 돕든, 양념 치대는 걸 돕든 엄마를 도우려고 했다. 얻어먹기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코로나 방역 지침이 바뀌면서, 동거가족이 아닌 이상 4명까지만 모임이 가능했다. 누나와 동생은 내려온다고 했고, 내가 가면 4명이 넘게 된다. 그래서 사진으로만 김장김치를 보고, 엄마가 삶아 준비한 수육을 봤다.
김장을 하고도 한참이 지났고, 그 사이 아버지가 크게 다치시면서 김장김치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며칠 전에는 엄마가 방에서 보는 티브이가 나오지 않는다고 내가 와서 봐줬으면 했다. AS기사를 부러면 되겠지만, 이제 엄마도 아빠도 가족이 아닌 사람이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귀에 잘 안 들어오는 모양이다. 돈을 보내고 받고, 계약을 하거나 물건을 사는 일이 이제는 더 힘들어져 버렸다. 시장에 가고 현금을 쓰고, 마트에 가서 주문을 하면 되던 세상은 빠르게 졸아들고 있다. 휴대폰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서, 스마트폰을 젊은 사람만큼 쓰지 못하는 엄마와 아빠는 불편을 몸으로 견디고 있다.
내가 쳐다본다고 티브이가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올 리가 없다. 이리저리 해봐도 말을 듣지 않는다. 엄마 말로는 몇십 년은 된 티브이란다. 우리 집에 쭉 있던 티브이는 아니고, 엄마가 알던 사람에게 얻어다 둔 티브이다. 엄마는 잠이 들 때까지, 혹은 잠이 들고 나서도 티브이를 틀어둔다. 아빠는 병원에 있으니, 집안에 들리는 사람 소리는 티비가 유일하다. 드라마 속 사람들의 대화가 없으면 집은 분명 조용하리라. 그렇다고 보지도 않는 거실 티브이를 틀어놓지는 않는다. 오늘 간 김에 엄마 휴대폰을 보는데, 엄마가 라디오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여성시대 같은 걸 듣는다고. 엠비시 라디오 앱을 깔아주고, 은행 앱도 깔았다. 예전처럼 은행 전용 인증서를 요구하지 않으니, 회원가입만 하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뱅킹이 가능했다. 그 점은 좋구나. 라디오 틀어서 듣고 앱 종료시키는 걸 알려드리고, 은행 앱을 켜서 송금하는 것도 가르쳐 드리고 같이 해보기도 했다.
엄마는 김치랑 햄 선물세트, 두부, 된장찌개를 다 싸기 시작했다. 일찍 오지도 않았는데, 다시 진주로 돌아가야 해서 나는 서두른다. 내년에는 꼭 김장할 때 도와드리러 와야지. 엄마를 도와드려야 하기도 하지만, 엄마에게서 김장을 배우고 싶다. 집에서 가끔 반찬을 만들면서, 늘 엄마의 맛을 재현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전에 한번 쓴 적도 있지만, 자식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부모가 물려준 것을 재현하게 된다. 재현은 복제가 아니기 때문에, 재현은 새로운 변이이기도 하고, 그래서 창조적일 수가 있다. 나이 들어가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나 아빠의 부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새 아빠가 70을 넘겼고, 엄마도 머지않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먹먹해지고, 시간이 눈에 띄기만 한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자고 싶어지는 심정이다. 더 자주 보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정답이겠으나, 그저 시간이 안 갔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그냥 시간을 보내도 좋겠지만, 내가 알지 못한 부모님에 대해 더 알고 싶다. 부모님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어려움을 함께 겪었는지, 힘든 순간,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는지. 그 시간이 다 지나가고 자주 생각나는 일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통해서도 부모님을 알 수 있지만, 부모님과 어떤 활동을 하면서도 부모님을 알아갈 수 있다. 아빠와는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지금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엄마의 경우라면, 엄마가 하는 음식들을 배우는 게 한 방편이 되겠다. 내가 집안일을 하고 음식도 가끔 하는 걸 칭찬하기는 하지만, 내심 '아들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내가 해주는 반찬이나 먹으면 좋으련만'하고 엄마가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엄마는 그냥 다 해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더 엄마의 김장김치를 배우고 싶다. 레시피도 레시피지만, 엄마가 어떻게 하는지 봐 두고 싶다. 다시 겨울이 오면 김장하는 모습을 찍어둬야겠다. 그 번잡한 시간, 김장을 마치고 둘러앉아 생김치와 수육을 곁들여 먹는 시간, 그걸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내일부터는 엄마의 김치 덕분에 우리 집 식탁은 한층 알싸해지겠다. '잘 먹고 있어'라는 말에 늘 기뻐하는 우리 엄마.
오늘 반찬을 가지고 부산 집을 나서면서, 엄마를 안아줬다. 지난해부터 종종 엄마를 안아드리고 있다. 아빠도 안아드린 적이 있구나. 어색할 것 없는데, 어색해하는 내가 바보 같다. 엄마는 내 등을 두드리며 '고맙다'라고 한다. 도대체 뭐가 고마운 것일까. 나는 엄마가 말한 만큼, 엄마에게 고맙다고 했던가. 자꾸 엄마한테 신세를 지고 그래서 나는 여전히 아이다.
다음에 가면 고맙다고 말하고, 엄마를 꼭 안아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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