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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책에 대한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집에는 책이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에는 학교 도서관에도 책이 많지 않았다. 책을 읽기에 아주 편안한 책상도 의자도 부족했다. 집에는 책이 가끔 들어왔다. 부모님은 분명 고심해서 ‘전래동화 시리즈’, ‘위인전’, ‘효녀 효자 이야기 시리즈’를 구하셨을 것이다. 내가 대단한 인물이 되지는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부모님은 왜 우리에게 책을 사주셨을까. 없는 살림에 책을 사면서, ‘이거 밖에 못해줘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 시진 않았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당신의 아이들은 몸이 덜 괴로운 일을 하며 살기를 바라시고, 그러려면 남들보다는 아니어도 남들만큼 책을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하셨을 것 같아 짠하다. 부모님의 책 읽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집에 있는 책을 읽어갔다. 티브이 만화는 5시 30분은 되어야 했기 때문에, 화면 조정 중이라는 화면만 보면서 티브이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갖가지 전집에서 재미를 느꼈는 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놔주지 않는 책이 있었다. 여기서 사로잡았다는 긍정적이지 않다. 내 마음은 그 책의 이야기에 잡혀 한동안 벗어나지 못하고 약간은 두려움에 떨었다. 한 효자가 있었다. 흉년이 계속되는 데, 부모님은 몸져눕기까지 하셨다. 지나가던 스님이 보고는 ‘고기를 좀 먹이면 나을 것이다.’ 한다. 그놈의 스님은 온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지적하고 미래를 알고 있다며 사람들의 삶에 간섭한다. 차라리 쌀을 주라. 선택만 하면 미래를 보장한다는 한 가지 답을 제시하는 스님의 모습은 그때도 싫었고, 지금도 그런 스님은 싫다. 그것과는 별게로 나는 ‘고기’ 부분에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튼 ‘효자’인 아들은 자기 살을 떼어 내어 구워서 부모님에게 먹인다. 그림에 벌건 피와 살을 그려놓지는 않았겠지만 내 상상은 그런 그림을 만들어 냈다. 끔찍. 부모님은 완쾌되고 나중에 그 일을 알게 되어 눈물을 흘리며 아들에게 고마워한다. 

 

내 부모님이 아프시면 나도 저렇게 살을 떼어 구워야 하려나. 살을 떼어낼 때, 아니 잘라낼 때 그 고통은 어떨까? 저 살도 구울 때는 아빠가 월급날 사들고 오는 봉지에든 삼겹살 같은 고소한 냄새려나? 부모님을 위해 살을 떼어 굽지 못하면 효자가 아닌 것인가? 난 몇 주간 부모님이 절대 아프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 나는 도저히 살을 떼어 구울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도저히 ‘효자 깜’이 되지 못하는 나를 비난했다. 

 

지금 집에도 ‘전집’세트가 있다. 아내는 ‘가성비’가 좋고, 어차피 ‘알고 가야 아이한테 좋다’며 전집을 샀다. 나는 동식물에 대한 책들은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옛날이야기를 다루는 그 책들은 마뜩지 않다. 효녀는 어머님을 위해 약초를 따다가 죽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왕자님만 기다린다. 그게 전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몰래 그 전집을 버리고 싶다. 아, 생각난 김에 조금씩 버려야 할 듯. 

 

아빠는 큰 돈 들여 사둔 백과사전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를 바랐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빼고 넣기가 어려웠고 글자가 너무 작았고, 나는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다. 초등학생에게 세상은 딱 그 높이만큼만 보인다. 십자군 전쟁이니, 핵무기, 암모나이트 따위의 표제어들은 내게 너무 동떨어진 세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찾아 나섰다. 왜 그랬을까? 

 

‘책을 읽는 행위’는 멋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다. 내가 사랑하고 눈을 떼지 못하는 장면이 두 가지 있다. 여자분이 싸이클 자전거를 타는 것(지금처럼 ‘로드 자전거’라는 자전거가 유행하기 전에는 ‘싸이클’ 자전거로 불렀다.), 누군가 책 등은 세 손가락을 받히고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책을 벌리고 읽는 모습. 집에서는 책 읽는 사람을 보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책 읽는 사람을 봤으리라. 운동장에서 공을 쫓아다니거나, 공을 쳐대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는 애초부터 책과 티브이에 매달렸다. 

 

초등학교 5학년 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방과 후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활동에 참여했다. 아마도 학생들의 신청을 받고, 그 학생들이 정해진 요일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도록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매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어떤 요일은 책을 보러 간다며 기대에 들떴기 때문이다. 작은 도서관은 열린 공간이 아니었고 앉아서 읽을 공간은 6인용 테이블 두 개 정도였던 것 같다. 

 

정오가 지난 시간 햇볕은 너무 내리꽂지도 않고 너무 눕지도 않은 각도로 도서관 안을 비췄다. 햇볕은 책의 수명에는 해가 되겠지만, ‘책 읽는 공간’을 구성하는 데는 필수적이다. 책을 가지고 조용히 앉아서 아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책을 펴고 책을 읽거나, 책에 대해 생각하거나, 근처에 앉은 여학생이 책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에 대해서 생각하면 된다.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책을 읽는 나’에 대해 약간은 호기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책 읽는 사람들에 대한 환대’가 도서관의 분위기를 채우고 있었다. 책 읽는 사람과 가만히 앉아 있는 책과 ‘책 읽는 사람들에 대한 환대’라는 분위기는 도서관에 가득 차서 누가 문을 열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단단한 젤리처럼 향을 내며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그 속에서 그 분위기의 일원이 된 것에 도취해 있었다. 

 

그래서 버스에서 읽는 책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버스 맨 뒷자리로 가서 책을 꺼내 읽는다. 내가 책을 펼치며 햇볕이 책에 앉고 나는 책이 너무 밝아 눈이 시지 않도록 책을 비스듬히 기울인다. 그리고 ‘책읽는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의 눈길’ 덕분에 재빠르게 도서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책도 도서관도 좋아하지만, 내가 잘 못 견디는 게 있다. 어떤 행위를 반복하거나, ‘움직임 없는 활동을 한 동안 지속하는 것’. 책읽기는 눈과 마음은 바쁘지만, 풍경은 정물화다. 나는 책을 읽다가도 나의 책 읽는 풍경을 보면서 그 ‘정적임’에 지루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모순이라니. 책을 많이 읽고 싶으면 30분은 참아내야지!! 하지만, 버스 안에서는 풍경이 조금 바뀐다. 나는 가만히 있으니 한 페이지 읽고 창 밖을 보면 풍경이 바뀌어 있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이다가, 백화점이 보이다가 산이 보이다가 그런다. 마치 뛰어놀고 있는 것처럼 눈은 책과 풍경을 왔다 갔다 하며 신나 한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면 더 많은 책을 읽었을 텐데. 

 

이제는 30분, 1시간 정도는 가만히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욕심은 ‘활자중독’이다. 늘 읽을 거리를 찾아 손을 뒤적이는 사람. 스마트폰은 열심히 나를 방해하고 나는 스마트폰에 기꺼이 내 몸과 마음을 내어준다. 요즘에는 책 읽는 데 스마트폰이 기여하도록 한다. 책을 읽는 시간을 기록한다. 하루 1시간 이상 독서시간 확보가 목적이다. 투명한 돼지저금통처럼, 책을 읽고 기록하면 배가 차는 게 보인다. 지적 활동을 숫자로 보상받는다. 그렇게 일단 읽기만 하면 그 이해는 자연스럽다. 다행한 일이다. 부모님이 사주신 위인전이나 전래동화 덕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내가 읽는 책에서는 효자가 자기 살을 굽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이 자주 나를 놀래키는 것은 당연하다. 앵무새 죽이기를 읽으면서 마을과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눈먼 자들의 도시’를 상상하면서 눈감고 뜨기가 섬뜩해질 때도 있다. 은유 작가님을 만나며 한참 때늦은 ‘덕질’도 해본다. 책 읽기는 책 만드는 사람, 책을 쓰는 사람, 책을 팔거나 빌려주는 공간, 독서대, 만년필, 연필, 이북기기, 독서모임, 글쓰기 모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확장된다. 

 

최초의 기억이란 게 옅어져서 도대체 언제부터 읽기를 시작했는지, 어떻게 ‘읽기의 재미’를 알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쓴 나의 기억이란 것이 그저 ‘좋은 기억에 가깝다’는 점에 안도한다. 나를 아껴주신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선생님든, 카리스마 있는 수업으로 남자 중학생들을 휘어잡았던 중학교 선생님이든,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든, 이청준의 ‘축제’이든, 진주문고든, 누군가, 무엇인가, 어딘가가 내 안의 ‘읽기에 대한 즐거움’을 이룩해냈다. 그것에 감사하다.

 

부모님은 어떤 생각으로 나에게 책을 사주셨을까.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도 책을 사주셨으니, 아마 책을 읽으셨다면 더 많은 책을 사주고 싶지 않으셨을까. 얼마전에는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나’를 읽고서 유튜브로 ‘갖가지 막장 사연’을 듣는 엄마에게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어주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가 사준 위인전의 위인이 되지도 제 살을 굽기는커녕 고기도 자주 대접하지 않는 아들이 되어 버렸지만, 그때 사주신 책이 분명 내 책 읽기의 마중물이 되었을 테니, 그 재미와 기쁨을 전도해야 그 책 값은 하는 게 아닐까. 

 

아들이 보고 있으면 더 보란 듯이 책을 읽고, 재미있으면 무슨 책이든 아들한테 이야기 한다. 오늘 아침에는 ‘연의 편지’를 권했는데, 역시나 이 녀석 ‘마법천자문’으로 돌아가더라.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분명히 말하기 어렵지만, 책을 읽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세상 모든 재미가 책과 경쟁한다고 하더라도, 책은 그 모든 재미를 넘어서는 재미를 갖고 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니 더 좋다. 답이 뻔한 문제가 재미있었던 적이 있던가. 그래서 서점에 가면 나도 읽고 싶은 아들 책을 고른다. 아들이 떠올리는 ‘최초의 책 읽기’ 경험은 언제가 될까. 그저 ‘읽기의 즐거움’을 세우는 데 내가 도움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