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중고차에 달려 있던 선바이저(차창에 붙여서 비를 막을 수 있는 플라스틱 재질의 물건)를 떼어 냈었다. 한 일주일 전쯤인가. 차는 검은색, 선바이저는 번쩍이는 크롬. 그 색이 마음에 안 들었다. 차=교통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의 외형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는데,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것.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차로 가서 선바이저를 뜯어냈다. 운전석 옆을 먼저 뜯는데, 3M 테이프가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하나만 뜯어낼 수는 없지 않나? 모두 뜯어 버렸다.
아마도 4년을 거기 붙어 있었겠지, 썬바이저는. 테이프는 거의 차와 한 몸이 된 듯 질기게 붙어 있었다. 엄지손톱을 테이프와 차 표면 사이에 넣고 뜯어 내었다. 정말 뜯어 내어서 멀리서 보면, 테이프는 이빨에 씹힌 것 같은 모양이 되어 버렸다. 새 차 같은 외관의 중고차였는데, 선바이저를 뜯고 나니 제대로 중고 티가 났다. 이런.
그제야 검색을 시작한다. 흠. 뜯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조언 1. 여름에 뜯어라. 햇볕에 달궈진 테이프는 죽죽 잘 늘어나고 잘 떨어진다고. 나는 실패. 조언 2. 되도록 길게 늘인다는 생각으로 제거해야 된다. 하하. 나는 이미 다 긁어 먹어버렸다. 그다음 찾은 내용도 별 도움이 안 된다. 물파스를 바르면 된다, 스티커 제거제도 충분하다, 3M 테이프 제거를 위한 기계를 아마존에서 직구했더니 잘 되더라. 약간 욱신 거리는 오른손 엄지를 보며 나는 약간 후회했다. 그리고 오늘 주문한 '새' 선바이저가 왔다. 검정에 가까운데, 반투명이다. (흠, 크롬보다는 훨씬 낫군)
왜 가끔 결말까지 생각해 보지 않고 일을 벌이는 걸까. 수업을 준비할 때는, 수업의 순서, 내가 던질 질문, 학생들에게 통할 우스개 소리도 미리 생각해 간다. 25명 정도의 영혼이라는 거대한 재기발랄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나의 행동만은 계획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5분 뒤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후회는 잘하지 않는데, 그 불편은 모두 나의 몫이니 '과거의 나'를 가끔 혼내주고 싶어 진다.
어쩜 너무나 자주 '기승전결'까지 생각하다보니,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내지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선바이저를 뜯은 것일까)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정해져 있는데,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에너지도 그렇다고 한다. 여러 가지 종류의 에너지가 있을 텐데, 사람은 '결정'하는 데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오늘 밤 내일 입을 옷을 정해두는 것은 참으로 좋은 생각이고,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일은 굉장히 건강한 일이다. 너무 하찮은 일을 고민하면, 중대한 일을 노심초사해서 결정해야 할 때 맥이 풀려 버리는 수가 있다. 중대한 일에 대한 결정을 남에게 맡겨버리게 되는 수가 있다. 하루 동안 헛짓을 하지 않고 보내려면, 내 결정하는 힘을 아껴 쓸 필요가 있다.
아, 나는 자주 그런 에너지는 아껴왔던 것 같은데. 인생을 아주 우습게 알고 해야 할 결정을 근거가 아니라 기분에 맡긴 적도 있다. 내 헛짓 중대표적인 것은 대학생 때 저질렀다. 교양, 전공선택, 전공필수. 학생들은 대개 '졸업 이수 학점'을 계산해 가며, 듣고 싶거나 쉽게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과목을 신청하는 것 같더라. 나는? 친구 따라 들었다. 그리고 이수해야 할 학점보다 더 들었다. 왜? 한 친구의 시간표만 꿋꿋이 따라 들은 게 아니라, 친구를 옮겨 다녔기 때문. 같은 과 친구들이라서 그나만 다행이라고 할까.
그런 헛짓에서 오는 스트레스에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 또 신기하다. 그래 자책하는 성격이라면,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살 지도 모르지. 나는 허허 웃으며, 등록금 비슷하게 내고 더 들었으니 괜찮군.. 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대개 내가 내린 결정에 확신을 갖고 싶어 한다. 지금의 행동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결말을 그려본다. 하지만, 인생에 헛짓은 난무할 수 밖에 없다. 선바이저를 뜯어낼 때, 나는 테이프가 그 모양으로 더럽게 들러붙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걸 알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부분은 내가 모르는 부분이다. 그 부분이 내 발목을 잡고 나를 넘어뜨릴지도 모른다. 헛짓이란 대개 그렇다. 뒤돌아 보면, '저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만, 그때는 정말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다 고만고만하니까, 전 세계에서 24시간 동알 일어나는 헛짓의 총량을 평균하면 매일매일이 비슷하지 않을까. 코로나 전염환자 증가하는 것처럼 그렇게 매일 늘지는 않을 것이다.(그래서는 안돼!)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내가 차대는 헛발질이나 다른 사람이 차대는 헛발질이나 비슷한 양이지 않을까. 이런 순간에는 나는 딱 평균적인 사람이지 라고 주문을 외운다. 어차피 저지르게 되는 터무니없는 짓이라면, 선바이저, 시간표, 작은 찰과상이나 멍, 돈 흘리기, 뜨거운 거 먹다가 혀 대이기 같은 짓이면 좋겠다. 작은 길에서는 헛발질해도, 큰길에서는 차근히 조심히 잘 걷고 싶다.
나는 사람이 가진 운의 총량이 있다고 믿는 편이니, 헛짓의 총량도 있지 않을까. 그간 내가 헛짓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했다면, 이제 좀 줄어가지 않을까 라고 믿기로 한다.
오래된 썬바이저는 웬만해서는 뜯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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