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재우고 나서, 블로그 글을 하나 쓰고 나서 맥주를 마시기로 마음먹었다. 딸이 잠들기를 기다리는 데 시간이 꽤 지나버렸고, 바로 마실 수는 없고, 나는 이 글을 마쳐야 맥주를 마실 수가 있다. 맥주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까.
우선, 이 맥주를 선물해 주신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술에도 ‘맛’이 있다는 것을 대학생이 되기 전에는 몰랐다. 귀밝이술 말고 술을 ‘제법’ 마셔본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인 것 같다. 사물놀이 동아리였는데, 공연이 끝나고 선배들이 구포시장 통닭 골목에서 소주와 통닭을 사줬다. 아, 그렇다고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아니다. 그저 어른도 없이 술을 여러 병 시켜놓고 마신 게 처음이라 굉장히 강렬하게 기억해서 그렇다. 술은 당연히 ‘저렴한’ 소주였고, 나는 한 잔을 채 다 마시지도 못했다. 걔 중에는 제법 많이 잘 마시는 놈들이 있었다. 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있는 다락방 같은 곳이었는데, 거기에 ‘미성년자들’ 손님을 받았던 모양이다. 당시에 나는 ‘불나면 다 죽기 십상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그때 소주를 마시면서 든 생각은 ‘이건 다시 먹지 말자’였다.
하지만, 그렇게 소주와 인연이 연을 끊을 수는 없다. 대학교에 가서 ‘선후배 대면식’이라는 걸 가니 선배들이 ‘소주만’ 시킨다. 고등학생만 가난한 게 아니라, 대학생도 가난했던 것이다. 대학은 더 별루였다. ‘억지로’ 마시라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그렇게 마시는 줄 알고 제법 술을 마셨다. 소주는 그 맛부터 소주와 얽힌 뒷이야기까지 모두 쓰다. 나는 평생 아버지가 반주로 소주 반 병씩을 마시는 걸 봐왔는데, 왜 아버지가 그리 소주를 마셨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싸고, 빨리 취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지금에야 생각한다. 소주가 아무리 써도, 아버지 인생만큼 쓰지는 않았던 것일 수도.
맥주를 사주는 선배는 별로 없었다. 대학가 앞에서의 맥주는 ‘생맥주’를 말한다. 나는 그 생맥주라는 게 어떻게 유통되는 지 모르는데(아직도), 맛을 생각해 보면 대강 알 것 같기도 하다. 문구점에서 파는 콜라 같은 맛이었다. 콜라맛 원액에 물과 탄산을 탄 맛. 생맥주라는 게 맛이 딱 그랬다. 맥주가 맛있다는 집에 가면 맥주값도 안주값도 비쌌다. 보리차에 술 탄 것 같은 혹은 병맥주에 물탄 것 같은 그런 맥주였지만, 그래도 맥주는 소주보다 나았다. 마시면 쉬이 배가 불러도 소주보다는 맥주가 좋았다. 그저 싼 맛에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자리가 즐거웠으니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거나 그냥 술맛이 나기만 하면 마시고 취하고 노래하고 그렇게 놀지 않았었나. 다시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면 술을 좀 줄이고 싶긴 한데, 많이 줄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학년이 높아지면서는 억지로 마실 일이 줄었고, 여러 사람과 마시는 것은 재미도 없다는 걸 알았다는 점이다.
세계맥주, 비어마트 등이 유행하면서 이제 ‘맥주’의 맛을 보기 시작한다. 시간이 좀 지나면 호프집이 아니라, 비어 00 등 맥주를 전면에 내세운 가게들이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보던 미국의 펍을 연상시키는 다트게임, 노란 조명 아래의 바. 이제는 슬리퍼 끌고 집 앞 편의점에만 가면 30종은 되는 맥주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수가 있다. 수제 맥주점도 생기고, 각 지역에서 자기 고장을 대표하는 맥주를 만들기도 한다. 제주도 같은 곳에서는 브루어리 투어도 가능하다. 마시고 취할 거리들이 늘었다.
어릴 때는 ‘취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했다. 취향이 있으려면, 즐기는 게 여러가지 있어야 한다. 여러 가지에 취해보고, 그중 취사선택하고, 좋아하는 것을 좇아야 ‘취향’이 생긴다. 그런데 나는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좋은 음악을 들었던 것도 아니라, 고상한 음악적 취향 따위는 없다. 책을 아주 충분히 많이 읽은 것도 아니라 책에 대한 취향이랄 것도 아직 없다. 커피는 좋아하는 편이나, 커피콩의 맛까지 구분하는 편은 아니다. 와인은 그저 너무 떨고 달지만 않으면 좋으니 이것도 취향이라 하기 그렇다. 왠지 취향은 설명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으니까. 맥주도 두루두루 좋아하는 편이라 취향이 있다고 하기에는 모자라다. 술을 마시면 면역력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꽤 바쁘기도 해서 한참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 최근에야 여유를 찾고 밤에 한 캔을 비우고는 한다. 오늘 밤도 그런 날인데, 이 글을 쓰는 데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것인가.
취향도 취미랑 비슷하다. 시간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어야 한다. 즐기려면 돈을 써야 한다. 도대체 돈을 쓰지 않고도 즐길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걸 찾으면 좋을 텐데 아직 찾지 못했다. (아, 물론 책은 굉장히 저렴하고 가성비 좋은 놀잇감이기는 하다. 그러니 책을 사자..) 시간도 돈도 없는 사람은 취미에 있어서도 취향에 있어서도 결국 가성비를 찾게 되는 게 아닐까. 가성비는 굉장히 ‘합리적인 소비’를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인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되는 것 같다. 무얼 사려거든 그저 되도록 비싼 걸 사면 가성비는 떨어질지 몰라도 ‘성능’은 따라온다. 그래서 ‘가성비’라는 단어는 늘 입에 달고 살기에는 서글프다. 맥주 이야기를 하다가 가성비로 와 버렸다. 우리가 무언가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면 가성비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하지 않을까. 올바른 소비는 필요한 데에 돈을 쓰는 것, 계획한 곳에 지출하는 것이지만, 소비를 하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에 돈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시원하게 써버리자. (단, 소비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오늘 내가 마시는 맥주 한 캔에 대해서는 가성비는 생각하지 않겠다. 라고 하지만, 가성비가 좋습니다 여러분. 선물 받았으니까. 이제 할 일은 맥주 캔을 따서 좋아하는 잔에 붓는 겁니다. 그리고 입을 갖다데고 거품 사이로 맥주를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혀에게 맛을 보일 생각은 하지 않고 바로 목으로까지 넘겨버리면 됩니다. 혼자서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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