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수능 영어에서 EBS 수능 교재와의 연계율 50%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계는 주제연계로 EBS 수능 교재에서 다루었던 주제가 실제 수능에서 제시될 수 있다는 정도다. 수능 영어 영역에서 득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능 특강에서 다루었던 지문에 제시된 내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깊은 배경 지식을 가진 학생이 수능 영어에서도 유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수능을 대비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영어 지문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배경이 된다. 더 깊은 영어 공부를 위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학교에서의 대비
수업 시간 중 학생들과 다루는 지문은 한 단락 길이다. 한 단락으로 내용 이해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전후 문맥을 고려하면 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뿐더러, 학생들이 익숙하지 않은 주제라면 그 한 단락이 전체 글 중 어떤 부분에 해당하는지 살펴보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업 중 다루는 지문의 경우 모두 출처가 되는 원서를 모두 검색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책의 제목 정도는 설명하고 중요한 주제(기출로 나왔거나 최근 각광받는 분야라면)라면 내용에 대해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소개하지 않더라도 나부터 해당 주제와 관련된 번역서를 읽거나 원서를 구입해서 읽는다.
학생이 할 수 있는 일
오로지 수능 영어 영역만을 위해서 관심에도 없는 책을 읽기는 어렵다. 다양한 곳에서 독서 목록을 제시한다고 해도 독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 도서 목록에는 반드시 고전이 끼어 있다. 독서를 충분히 해왔고 하고 있는 학생들이라면 당연히 고전을 손에 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고전으로 바로 돌입하기는 어렵다.
다니엘 페나크는 자신의 작품 소설처럼에서 책 읽기에 대해 이렇게 쓴 바 있다.(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책읽기에 대한 책이라 봐도 무방하다. 아주 얇으니 읽어보시길)
- 책을 읽지 않을 권리
- 건너뛰며 읽을 권리
-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 책을 다시 읽을 권리
-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 소리 내서 읽을 권리
-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개인의 흥미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책 읽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6명 정도는 1년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2023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대해 다룬 기사를 보면 학생들은 점점 더 책을 많이 읽고 있다. 어른들보다 나으니 오히려 희망이 있다고 할까. 아무튼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책을 읽는 일이고, 학생들에게 책을 권하는 일이다.
이제라도 책을 읽기를 희망하는 학생이라면 자신의 흥미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다. 부끄럽지만 나도 일년에 책을 두세 권 밖에 읽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정도 책을 읽으면서 나의 '독서 취향'이랄 게 있을 리가 없다. 연간 60권 정도를 읽게 되었을 때, 책을 읽을 방향에 대해 생각했다. 늘 시작은 재미있고 좋은 책 한 권이었고, 그 책은 또 다른 책으로 나를 이끌었다. 좋은 책을 만나고 좋은 저자를 만나게 되면, 결국 그들의 생각의 역사를 따라가게 된다. 따라가면 결국에는 고전을 만날 수밖에 없다. 거기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 그러니 '고전 읽기'에 지나치게 부담을 갖지 말고, 자유롭게 책을 읽되, 나를 성장하게 해줄 좋은 책을 자꾸 탐색하는 게 좋겠다.
우선 권하는 한 권의 책
그래도 우선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재미가 있고, 수능 영어에도 도움이 되고, 게다가 고전으로까지 나를 끌고 갈 수 있는 책이다.
양자오, 종의 기원을 읽다. 유유출판사
양자오선생은 대만의 학자다. 논어, 장자부터 토크빌의 미국 민주주의까지 섭렵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 유유출판사는 양자오 선생의 책을 번역하여 계속해서 펴내고 있다. 다른 책도 좋지만 먼저 종의 기원을 읽다를 권한다.
'종의 기원'을 모르거나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다. 고전이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의 다른 이름 아닐까. 수능 영어의 경우에도 진화론과 관련된 내용은 자주 나온다. 올해 EBS로 수업을 하면서도 전국연합평가에서도 관련된 지문을 봤다. 몰라도 해석하고 문제를 맞힐 수 있겠지만, 알면 해당 지문에 대한 접근이 쉽고 내용 파악을 정확히 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이 발간된 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그 영향력은 여전하다. 위대한 지성이 쓴 글을 오늘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하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그닥 호락호락한 책이 아니다. 초반 100페이지에 온갖 종류의 비둘기가 소개되어 책을 손에서 떨구게 될지도 모른다. 다윈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윈이 왜 종의 기원을 쓰게 되었는지, 그 당시 다윈이 알고 있던 것과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우리를 종의 기원에서 멀어지게 한다.
양자오 선생은 다윈 가족의 일대기를 밝히면서 다윈이라는 사람에 대해 친숙함을 갖게 해준다. 종의 기원 전체에 대해 그 논의 흐름과 이유에 대해 밝히고, 다윈의 진화론에서 비롯되었으나 상당히 그 의미를 왜곡시켜 버린 다윈주의에 대해 간단히 다룸으로써 '과학적 가설'에 대해 가져야 할 조심스럽고 겸손한 태도에 대해 알려준다. 양자오 선생의 이 책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데, 읽으면 읽을 수록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그 마음이 들었다면, '종의 기원'도 참고(?) 읽을 수 있다.
다음에는 다른 책으로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읽더라도 평생 3~4000권 정도의 책 밖에 읽지 못한다고 한다. 누군가는 이 계산을 끝내고 펑펑 울었다. 우리도 뉴턴처럼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세상을 보고 대단한 업적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거인의 어깨 근처까지 가보지도 못할 수 있다. 그래도 책은 언제나 열려 있고 책을 통해서 우리 인류의 지성들이 다녀간 자리를 따라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거인의 어깨로 향할 수 있는 책 한 권을 다음에 또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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