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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기 좋은 책으로 도망가기

타츠루 2022. 3. 18. 21:23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인기있는 책은 역시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읽어야 제 맛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구석은 먼지가 날리기 마련이고, 그 먼지가 가라앉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 많은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사람들이 물러간 자리여야 찾아가서 앉는다.

일이 많은데, 잘 하지는 못 해서, 나는 한 주 내내 책 속으로 도망갈 생각을 했다. 다음 날을 위해 일찍 잠들어서, 아이폰은 나에게 잠자는 시간을 잘 지켰다며 칭찬을 했다. 정말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나 생각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1분, 신호를 기다리는 30초도 책을 읽을 수는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다, 책값이 비싸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저 책이 해야 할 일의 순위에서 자꾸 밀려나다가 잠과 함께 잠들어 버린다.

오늘은 결국 책으로 도망하는 데 성공했다. 예정되어 있던 먼북소리를 취소했기 때문이다. 취소되었다고 쓰고 싶지만, 취소한 사람은 나다. 예정된 약속은 어그러질 수 있고, 예정된 만남은 취소될 수 있다. 그 예정되었으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린 약속은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첫 페이지를 폈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소설의 첫문장은 시의 첫 문장만큼이나 중요한 게 아닌가 싶다. 소설의 첫문장이 늘 이 책처럼 좋았던가 생각한다. 소설을 적게 읽은 나로서는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으나, 최근 읽고 있는 소설들의 첫 문장은 왜 다 이렇게 읽기 좋을까. 침대 곁에 두고 읽는 '싯다리트'(헤르만 헤세)의 첫 부분이다.

집의 응달에서, 가까이에 나룻배들이 떠 있는 강가 양지 바른 곳에서, 사라수의 그늘에서, 무화과나무의 그늘에서, 바라문의 아름다운 아들이자 젊은 매인 싯다르타는 역시 바라문의 아들인 친구 고빈다와 함께 자랐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일을 빨리 하지 못하는 나는 학교에서도 자주 책 속으로 도망가고 싶다. 모노테스킹이란 한번에 한가지 일을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한번 시작한 일을 끝끝내 끝내는 데 있는 게 아닌가하고 요즘 생각한다. 내게 부족한 부분이라 나는 또 열심히는 하지 않을꺼야*라고 하면서도 *잘 해낼 방법을 궁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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