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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Stuff

꽃화분에 대한 책임감이 버거워

아내 생일이라 꽃을 샀다. 근사한 곳에서 외식을 해도 좋겠지만, 아내는 코로나가 시작되고 외식을 완전히 끊었다. 일하다가 배달의 민족 앱을 열어서 포장해 가서 같이 먹을 음식이 있나 살폈는데, 아무리 봐도 아내가 좋아할 만한 게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건 ‘뼈다귀 해장국’. 먹은 지도 오래되었고, 아내가 좋아한다.

퇴근하려고 차에 올라 우선 주문을 하고 달려간다. 뼈다귀해장국 2개를 포장해서 집으로 출발. 기념일이면 꽃을 사던 동네 꽃집으로 가서 꽃다발을 주문한다.
“선물할 건가요? 꽂을 건가요?”
“아내에게 선물 할 거니까, 곧 꽂을 것 같습니다.”
나는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꽃집 사장님은 선물용이면 포장이 더 들어가서 그만큼 가격이 높아지거나, 꽃을 빼야 한다고. 내 대답을 듣고는 적당히 알아듣고 포장을 과하지 않지만 정갈하게 해 주셨다. 포장을 하는 사이에, 꽃집 안을 둘러본다. 잘 자란 초록이들이 그득하다. 내가 키우다 죽인 녀석들, 내가 키우고 나서는 꽃을 피우지 않는 녀석들. 모두 여기서는 잘 자라고 있다. 꽃집의 생태란 어떤 곳일까? 어떤 꽃도 잘 자라게 하는 장소란 어떤 장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학생이든 잘 자랄 수 있는 공간이란 어떤 곳일까? 하는 생각이 지금 든다. 그런 장소가 있을까?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꽂는다고 해서 향이 많이 나는 것들을 많이 썼어요.”

꽃다발을 받아드니, 마스크를 꼈는데도 향이 진하게 밀려왔다. 장미향이 밀릴 만큼 다른 향이 그득했다.


꽃을 사러 갈 때는 꽃을 사야지 했는데, 꽃집 앞에 나와 있는 꽃화분을 보니 꽃화분도 좋겠다 생각이 들어서 잠시 입구에서 멈칫거렸다. 때마침 사장님이 나를 보고 나오셔서 들어가서 꽃다발을 주문하기는 했지만, 꽃화분도 좋았겠다 생각했다.

작지만 예쁜 꽃다발

집에 와서 뼈다귀해장국을 나눠먹고, 미술학원에서 딸을 데리고 오고, 당근 마켓으로 내 물건을 하나 팔고, 태권도 갔던 아들을 기다렸다가 케이크에 초를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꽃병을 꺼내어 꽃을 담았다.

“꽃을 사길 잘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말했다.
“화분은 부담스러워. 계속 키워야 하는 무언가를 사는 건 부담스러워. 쉽게 버릴 수도 없고.”


꽃은 시들면 버리면 된다. 꽃은 피어 있을 때에야 생명으로 대접받고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마음먹고 말려서 집을 꾸미는 게 아니라면, 시들어서 썩기 전에 버려야 한다. 하지만, 흙에 기대어 꽃을 피운 화분은 꽃이 지더라도 버리기가 어렵다. 기다리고 더 도와주면 다시 꽃을 피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게 책임감이라면, 원하지 않은 책임감은 원하지 않게 된다. 학교에서 담임을 하면 키우고 가꿔야 할 화분이 너무 많은 기분이다. 담임을 하지 않아도 책임은 느끼지만, 담임의 그것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학생들을 향한 내 책임감, 신경 쓸거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도 예쁜 초록이를 보고, 교실에 하나 갖다 두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걸 보는 학생들 기분도 더불어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몇 해 전에 담임을 할 때, 제법 여러 개의 작은 화분을 사고, 가장 학교 생활에 적응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학생들에게 맡기고 물도 주게 하고 햇볕도 쬐게 하라고 했다. 같이 분갈이도 하고, 물도 주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교실에 둘 것으로 하나 사 올 걸 그랬다.

이번에는 누구한테 맡긴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