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까 쥐라기 공원 봐서 무서워서 혼자 못 자겠어. 아들은 오랜만에 내 방으로 왔다. 그래, 옆에서 자. 아들은 동생 앞에서는 세상 무서운 게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어둡고, 총이 많이 나오고 피가 나오는 건 무서워한다. 그렇다고 그런 영화들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영화 속 이야기라 하더라도, 실제 하는 것만큼이나 무섭게 느껴질 수 있다. 아들은 자기 인형을 잔뜩 가지고 와서 내 옆자리에 누웠다. 귀여워. 아마도 오늘 잠자리는 불편하겠구먼…
딸은 어릴 때부터 만화 영화 속에서라도 무언가가 쫓아오고, 누군가가 쫓기는 장면을 무서워 했다. 쫓고 쫓기는 데 무서워하지 않는 건 톰과 제리 밖에 없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면서도 무섭다고 했다.
무엇에 대해서 왜 겁을 내는 지 이유가 있을까. 그건 얼마간은 그저 타고나는 것이라 우리의 설명의 영역을 넘어선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이 기질을 타고 나지만, 그 기질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밤을 무서워 했다. 그리고 그때는 귀신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몇 살 때부터 일까, 아버지는 나에게 자주 심부름을 시켰다. 쌀집에 가서 소금 팔아오기(당시에는 왜 소금을 사러 가는데, 아빠는 팔아오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콜라 사 오기, 담배 사 오기, 소주 한 병 사 오기 등등. 지금은 아이에게 시킬 수 없는(담배 사 오기, 소주 사 오기) 심부름이지만, 그때는 가능했다. 우리 집은 주택가에 있었고 가로등은 별로 없었다. 가게들은 모두 집에서 반경 300미터 안에 있었지만, 그때의 밤은 늘 지금보다 더 짙었다.
콜라는 나도 마실거니 좀 낫지만, 다른 걸 시키면 죽도록 가기가 싫었다. 하지만, 가기 싫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아이들은 내복만 입고도 동네가게까지 곧잘 돌아다녔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여름에는 러닝만 입고도 아이들은 잘 돌아다녔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제대로 된 외출복을 입어야 했다. 양말에 운동화까지 꼭 신었다. 2층짜리 다세대 주택(빌라는 아님) 안에는 7가구가 살았다. 느릿느릿 입을 삐죽거리며 옷을 다 차려입고 나서 아빠가 돈 준을 주머니에 넣고 대문을 나선다. 거기가 제일 무섭다. 대문을 나서면 주인집(우리 집은 우리 집이었지만, 우리는 그저 임차인. 언제 처음 들었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방을 빌려주는 사람을 부모님은 주인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부르는 게 싫었다.)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그리고 계단 끝에는 나무로 된 대문이 또 있었다. 그 계단부터 그 대문까지가 우리 동네에서 가장 어두운 곳이었다. 누가 숨어 있어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칠흙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문을 나서기 전 크게 호흡을 하고, 대문을 나서자 마자 냅다 달리기 시작한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가 귀신이 나를 따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내 얼굴은 바람을 가르고, 얼굴을 스친 바람은 내 귀에 쉬쉬 소리를 냈다. 다다다닥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속도를 줄이고 소주든 콜라든 아빠가 사 오란 것을 들고 다시 돌아온다.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길. 그래도 사람의 인기척이 반갑다. 하지만 결국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다시 귀신이 있을 것 같은 계단과 대문이 보이는 곳으로 혼자 가야 했다. 나는 급히 외롭로워지고, 누구에게든 하소연하고 싶어 진다. 방법은 하나뿐. 더 빨리 뛰어가야 한다. 콜라를 사들고 흔들면 안 된다. 마치 비둘기가 고개를 고정하고 걷듯이 콜라는 아래 위로 흔들리지 않게 잡고 냅다 뛴다. 대문에는 턱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높이 뛰어오르면 정수리가 대문 위에 부딪힐 수도 있다.
아빠에게 사다준 게 무학소주였다면, 나는 아빠가 소주 마시는 걸 보면서 골이 났을 것이다. 아빠가 퇴근하는 길에 좀 사올 것이지.. 내게 시킨 게 콜라였다면, 숨이 가라앉는 대로 나도 벌컥벌컥 들이켰을 것이다. (그때는 콜라는 1.5리터였는데, 왜 이제는 다 커져버렸을까)
언제쯤 그 계단과 대문을 겁내지 않게 되었을까. 겁을 냈던 순간은 기억하는데, 겁이 나지 않게 된 순간은 기억에 없다. 늘 불편한 것만 기억에 자리 잡는다. 편하고 편리하고 거슬리지 않는 건 늘 스르르 기억에서 미끄러져 나가 버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집에서 이사를 나왔고 그 골목으로 갈 일은 없었다. 이후에는 나를 겁나게 만드는 계단과 대문은 없었다.
무서웠던 순간이지만, 그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다쳐 누워 있는 아빠를 생각하면, 구글 포토 속 5년 전 사진에서조차 너무나 젊어 보이는 엄마 얼굴을 보면, 되돌리고 싶다. 되돌아 가고되돌아가고 싶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게 엄마, 아빠의 인생인 것처럼 되돌아가고 싶다. 되돌아갈 수 없어서 되돌아가고 싶다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내가 비열하다.
이제 귀신 따위는 겁나지 않는다. 그때는 사랑하는 것들이 적었고 잃을 것들도 적었다. 이제는 사랑하는 대상이 많고 잃고 싶지 않은 게 너무 많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는 게 이제는 더 무섭다. 아무리 내가 빨리 달려도 모두를 지킬 수가 없다. 숨을 참고 있어도 시간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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