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외면일기

나와 약속을 잡습니다

타츠루 2022. 3. 13. 21:13

농월정에서 비와 커피

다 좋지만, 오랜만에 방바닥에 얇은 이불 하나를 깔고 자니 잠자리가 불편하다. 게다가 갑자기 비염은 왜 도진 건지 밤에 누웠는데 콧물이 난다. 상당한 시간 동안 괜찮았는데, 봄이 오면 봄이 오는 대로 불편함이 생긴다. 어린 시절에는 생각하지 못한 불편함이 마음을 자꾸 건드린다.

그래도 아침에 빗소리를 들으며 대청마루에 나가 앉았다. 반바지를 입은 채, 겨울 재킷을 대충 두르고, 준비해간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렸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비가 오는 것을 본다.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간다. 새벽부터 내린 비 덕분에 농월정 오토캠핑장 케빈 앞은 물이 제법 차 올랐다. 산불이 심한 지역에도 분명 도움이 되겠구나, 밭에서 산에서 농작물을 키우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겠구나. 어릴 때 비는 그저 우산 쓰고 걸어야 하는 불편한 길을 만드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의 세상은 조금 지평이 넓어졌다.

손잡이도 없는 컵을 잡고 뜨거움을 느끼며 커피를 읊조리는데, 그 맛이 일품이라 남은 드립백 하나도 더 내린다. 집으로 와야 하는 짐을 싸야 해서 부산하지만, 아침의 여유만큼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늑장을 부린다.

생일을 맞이한 아들에게 생일 축하한다 이야기를 전하고, 손주와 통화하려던 아빠는 내 전화기가 꺼져 있자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어제 불가에 둘러앉아서 코로나 끝나면 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데(코로나 끝나면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늘 말하는데, 코로나는 끝나지 않는구나.), 아내는 가족들을 더 쉽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고 했다. 그 전에도 나는 자주 만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조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아직도 위협적이다.

아이들과 즐겨보는 유튜버인 원지*님이 미국으로 이민가방을 들고 떠났다. 4년전쯤 신청한 영주권이 이제 나와서 *덕분에 계획없이 미국으로 간다는 데, 고독하지 않아서 괴롭다 는 그녀의 말이 약간은 이해가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란 소중해서, 빼앗겨 봐야 정신을 차리게 된다.

일만 하고 집-회사만 오가며 스트레스를 풀 수 없는 직장인, 공부만 하거나 공부만 해야 해서 학교-집-학원만 오가며 피로에 찌들어 있는 학생들, 홀로 집에서 아이를 봐야 해서 화장실 갈 틈도 없는 엄마들. 간절히 혼자일 수 있는 시간을 바라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면, 나 주변의 사람도, 내 자신도 도와줘야 가능하다.

요즘 매일 Microsoft사에서 만든 To Do 앱에 할 일을 기록해 둔다. 월요일에 해야 할 일이 수두룩하다. 학교에서의 일이란 다른 사람의 요구에 반응 해야 하는 일이 많은 만큼, 요구에만 응하다 보면 정신없이 하루가 가기도 한다. 내가 나에게 요구하는 일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인데, 그런 일이 뒤로 밀리기도 한다. 학교에서도 한 시간 정도 나의 시간과 공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 시간과 그 공간을 내일은 좀 찾아야지 생각하고 있다.

일정을 관리하는 방법 중에,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일정으로 잡으라는 조언이 있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만 약속이 아니라, 나와의 약속도 엄연한 약속이란 말이다. 그렇게 나와의 약속을 잡아두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의 약속으로만 내 하루를 채우게 된다. 그런 하루는 생산적일 수가 없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오늘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라는 허탈감을 느끼기 쉽다. 내일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 내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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