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사/아빠로살아가기

새해 첫 날의 성적

딸과 산책, 유튜브 영상 하나 만들기, 혼자 라이딩, 아들과 밤 산책.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고2 겨울방학. 나는 친구들과 부산 해운대에 일출을 보러 갔다. 일출을 처음 보러 가는 사람이 으레 그런 것처럼, 해가 지평선에서 멋지게 떠오르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 기대하고 갔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해는 저 멀리 지평선에 깔린 구름을 지나 느지막이 솟아올랐다. 기다리기 지친 우리는 서로를 바다에 빠트렸다. 그 이후로 대학생이 되어 다시 한번 일출을 보러 가려했던 적이 있다. 친구들과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비디오방으로 가서 '반지의 제왕'을 틀어놓고 잠들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서사시도 끝나고 새벽의 추위를 뚫고 일출을 보러 출발했다.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있었던 데다가 관심도 없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차가 막히기 시작했고, 잘 됐다 생각하면서 차에서 모자란 잠을 보충했다. 이후로는 첫 해를 보려고 어디에 가 본 적이 없다. 

새해쯤이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지만, 건네 오는 인사에 답하고, 사람들이 보내준 일출 사진을 감상한다. 그리고 '무언가 달라진 건가?' 잠시 생각한다. 아, 한 살을 더 먹었구나. 늘 아이들이 크는 모습에만 마음을 쏟아 보니, 내 나이 먹는 것에는 무관심하다. 마흔을 넘은 이후로는 내 나이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회도 많이 줄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나이 어려 보이는 사람에게 자주, 그리고 쉽게 나이를 묻는다.)  내 나이를 챙기는 사람은 내 딸뿐이다. 

새해 첫날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아직 2020년도를 다 정리하지 못했다. 어제 간신히 2020년에 읽은 책을 정리했으니, 시간을 내어, 2020년에 이룬 건, 성취한 건, 즐거웠던 것에 대해 간략히 정리를 해야 겠다. 

2020/12/31 - [책] - 노션notion으로 정리한 2020 독서 목록

밤에 사진을 찍어보자 했지만, 아침 사진으로 만족 

아침부터 딸과 빵을 사러 나선다. 종이쓰레기도 들고나간다. 추우니 딸에게는 털모자를 씌운다. 내 털모자도 분명 겨울이 되기 전에 발견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빵집으로 가는 길이 멀다. 딸이랑 아파트 주변 산책로를 천천히 돌아본다. 오리들도 잘 있는지 살펴본다. 산책길 옆에 있는 운동기구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코로나 덕분에 낮에는 대개 집에 있는 경우가 많으니, 최대한 사람이 적은 시간에 이렇게 산책하는 게 좋다. 게다가 겨울 아침 공기는 다른 계절과 다른 '바삭함'crispness이 있다. 해 뜨는 걸 즐길 시간은 짧지만, 아침 공기는 꽤 여유 있게 즐길 수가 있다. 딸의 깔깔대는 소리에 귀가 밝아진다. 황소처럼 달려와 내 엉덩이에 부딪히는 딸과 놀면서 추위도 잊어간다. 뛰어다니느라 덥다며 딸이 벗은 벙어리장갑을 내 귀에 끼어 딸을 웃겨댄다. 딸이 좋아하는 샌드위치, 내가 커피랑 마실 디저트 빵, 아들이 좋아하는 마늘빵을 골라 집으로 간다. 

유튜브에 열심히 영상을 올리지는 않는다. 찍더라도 편집할 시간이 없다. 자전거 영상, 문법 설명영상, 선생님들이 쓰기 좋은 앱이나 웹서비스에 대한 영상 등 찍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편집할 시간이 없다. 아내가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하는 동안 부리나케 영상을 하나 찍는다. 얼마 전부터 구독자가 하루 한 두 명씩 늘었다. 그래 봐야 아직 800명도 안되지만, 선생님들이 방학을 맞이하면서 온라인 수업 준비를 다시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구독자가 늘었으니 '보답'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영상을 찍었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 나는 고수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시간을 낼 수 있다. 편집은 별로 재미가 없지만,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만큼은 분명 재미가 있다. 

아이패드와 맥북을 오가면서 영상을 컷편집을 하고, 자막을 넣고, 썸네일 이미지를 만들어서 업로드. 20분도 안 되는 영상인데, 촬영하는 것보다 편집에 품이 더 들어간다. 썸네일 만드는 과정이나, 촬영 작업의 흐름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 촬영이나 편집 과정에 나오는 여러 파일 관리도 문제다. 이것부터 정리하면 속도가 좀 빨라지지 않을까. 

와룡지구에서 라이딩 

아내가 밥을 준비하는 사이 딸이랑 아들이랑 논다. 아들은 요즘 자기 방에서 혼자 노는 시간이 늘었다. 엄마와 다양한 보드게임도 하는 터라 나는 요즘 딸이랑 자주 논다. 침대에서 씨름을 하기도 하고, 간지럽히기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배가 아프다고 해서 '아빠 손은 약속, ~ 배는 똥배'라며 배를 손으로 문질러 준다. 한데, 집에 가만히 있으니 좀이 쑤신다. 요즘 운동도 통 못하고 해서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 

금산교를 바로 지나 새로 조성된 와룡지구로 갔다. 금산교 아래 바로 있는 주차장과 그 옆 축구장에는 가봤지만,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다 가보지 못해서 오늘은 끝이 어딘지 확인해야지 생각하며 자전거를 탔다. 일단 자전거 도로 포장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자전거 타는 맛이 났다. 진주의 자전거 도로는 대개 '아스팔트 포장' 느낌이다. 최근에 조성된 희망교에서 유수역까지의 구간이 그렇다. 그런데 와룡지구는 인라인스케이트도 편히 탈 수 있을만한 포장 품질이다. 딱 그런 느낌으로 포장되어 있는데, 그 재질이 무언지를 모르겠다. 자전거가 도로에 잘 밀착된다. 물에 젖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물에 젖으면 위험해지는 건 아스팔트 포장도 마찬가지다. (비 오는 날, 아스팔트 도로 위 '페인트 도장면'은 정말 미끄럽다.) 자전거를 주욱 타고 가면서 보니 차박 차량이 상당히 많다. 캐러밴을 4대 이상 봤고, 텐트도 4개 동 이상, 차박 캠핑용 도킹 텐트도 봤다.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는데도 캠핑을 하는 걸 보면 진주에도 캠핑을 하거나, 차박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게 분명하다. 화장실까지 생긴다면, 이 지역은 '차박캠핑'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도 들끓지 않을까. 

바람이 세게 불었지만, 오랜만에 페달을 밟으니 기분이 좋았다. 가볍게 한 시간 가량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아, 아, 들리는가? 오바! 

저녁까지 먹고 아들에게 밖에 나가서 줄넘기도 하라고 했더니 추워서 나가기 싫단다. 같이 산책하자니까 그건 좋단다. (아들, 혼자 나가긴 무서웠던 거구나) 아파트 주변으로 산책로가 넓게 조성되어서 천천히 40분 정도 걸을만한 구간이 된다. 길이 조성되니 걷는 사람도 많이 늘었다. 아들은 무전기를 챙겨 나왔다. 둘이 같이 걷다가 아들이 저만치 먼저 뛰어간다. 

"아, 아, 담배피는 사람이 있다, 오버"

"아빠도 봤다, 오버"

별스럽지 않은 대화를 하며 아들과 걷는다. 나는 밖에서 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요일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디즈니 만화를 보고, 밥을 먹고 나면 책을 보거나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작은 부품을 몇 개 붙여 우주선을 만들고 머릿속으로 스타워즈 같은 우주전쟁을 재현했다. 아빠는 일주일 내내 일을 해서 피곤한지 아침을 먹고 나면 다시 잠을 주무시고는 했다. 그러다가 문득 "너는 왜 밖에 나가 안 노노? 좀 나가서 뛰어놀아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매번 그러지는 않았는데, 언젠가 한 번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나가지도 않았던 것 같다. 오늘 아들이랑 걸으면서, 그때 아빠가 같이 나가서 놀자고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아빠에게 섭섭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나에게 밖으로 나가 놀라고 했을 때 느꼈던 약간의 섭섭함 같은 것은 (1) 아빠는 나를 잘 모른다 (2) 아빠가 나랑 같이 나가면 좋겠다 둘 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들한테 같이 산책하자고 하길 잘했구나 싶었다. 

최고의 아버지가 되기에는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사랑을 아끼는 아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모자란 사람이라서 어렵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들과 딸이 더 크면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야 가야 할까 고민을 한다. 지금은 일단 체력이 좋아야 한다. 하하. 앞으로 몇 년간은 더 그렇겠지. 늘 오늘의 아들과 딸이 그립다. 가끔 내 생활의 중심을 너무 가족에게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될 때가 있다. 나 혼자서도 하고 싶은 게 많으니까. 

사람이 가진 자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에는 '시간'이다. 가장 소중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시간들을 잘 조직해야 한다. 가족들에게 협조를 구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스스로에게 협조를 구하면서 가족들과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늘 그런 조율은 균형 잡기 같다. 균형을 잘 잡으려면 멀리 보고 느긋하게 가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가려면 앞바퀴가 아니라 가야 할 방향을 쳐다 봐야 한다. 고개를 돌리면 누구라도 쉽게 넘어진다. 

새해가 되었다. 내가 가야할 방향은 어디일까. 너무 멀리 보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앞'인 것은 분명하다. 내일도 아들이랑 걸으면서 생각해 봐야겠다. 

새해의 좋은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