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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절묘한 자리


요즘 들어 나는 참 많이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어른이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 아닌가. 우리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도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른의 삶이란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역할 속에서 자기 자리를 잡고, 이겨내고, 견뎌내고, 지켜내면서도 하고 싶은 일까지 움튀워 하는 데 있다.

같이 살 때는 몰랐는데, 나는 내 식구들과도 충분히 대화하지 않으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구석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혼할 때 엄마는 한번 크게 섭섭해 했고, 가끔 동생도 나에게 섭섭해 하고, 누나도 그렇다. 흠. 다행히 나는 식구들에게 별로 섭섭했던 적이 없다. 섭섭한 게 있으면 섭섭하기 전에 말하면 되지만,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말하지 않고 참다가 말하면서, “몇 번을 참다가 이야기한다.” 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쉽다. 참았던 고백이 갑작스러운 것처럼, 참았던 토로도 갑작스럽다.

대개는 별 일이 아닌 디테일 때문에 섭섭함을 느낀다. 나는 빨리 용서를 구하고, 미안하다 이야기한다. 더 나은 해결책은 없었을까? 더 나은 접근 방법은 없었을까?

우리의 마음이란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고, 말로 하기 전에는 세상에 내 마음은 나타나지 않는다. 꽃=애정 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지 모르겠지만, 널리 통하는 등식이라고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긴 말은 짧은 행동보다 낫다. 말로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없지만, 말의 역할은 대단하다.

오늘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전화 통화지만 몇 번을 해야 했다. 부탁하는 전화, 설득하는 전화,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이야기해야 하는 전화. 두 개는 온전히 나의 일이 아닌 것, 하나는 반드시 전화를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전화를 했다. 묵혀두면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참으로 일을 잘 미루는 사람이라, 묵혀두고 묵혀둬서 발등에 불이 나면 뛰쳐 나가듯 일하며 불도 끄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관련되어 있으면 불이 나게 두어선 안된다. 나만 타는 게 아니라, 주변을 다 태우는 수가 있다.

그래도 오늘은 괜찮은 날이다. 출근도 자전거로 퇴근도 자전거로 했기 때문이다. 얇은 긴팔 티셔츠 하나에, 얇은 겨울 재킷 하나지만, 자전거타기에 딱 좋은 의상이다. 타자마자 발을 구르고, 조금 몸이 데워지면 지퍼를 열고 페달을 쉬엄쉬엄 밟는다. 매일 자전거 출퇴근을 할 때는 은근히 속도가 높아졌는데, 요즘에는 ‘나만의 속도’를 찾아가고 있다. 너무 힘들지 않게 탈 수 있는 속도를 찾고 있다. 이렇게 타면 마치 평생 자전거를 탈 수 있을 것 같은 속도를 찾고 있다. 이렇게 타면 평생 자전거 안장에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세를 찾고 있다. 도로 위에서 혼자 양발을 놀리며 균형을 잡다 보면, 낮아지는 무게중심처럼 마음도 조금 차분해 진다. 당기던 뒷목도 좀 편해 진다.

많은 사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 누군가 그랬듯이, 그래서 우리 모두 인간이라 생각한다. 기대하되 너무 기대하지 않고, 노력하되 나를 또 너무 채찍질 해서는 안된다. 열심은 무슨 한자로 쓰여진 단어일까.


흠. 그렇군. 다 불태울 수도 있을 단어다. 너무 열심히 하면 다 타고 burn-out 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열은 에너지요, 무궁무진한 에너지는 없다. 에너지를 아끼지 않으면, 내 속부터 태워나오지 않을까.

딸이 좋아하는 레드향을 두 묶음 집어 담고, 아들과 딸이 좋아하는 젤리를 두 봉지씩 담고, 아내와 먹고 싶은 맛동산을 가방에 담아 집으로 왔다. 집은 따뜻하고, 딸은 나를 반기며 안아준다. 어른이란 참으로 누릴 게 많다. 내 역할 하나하나는 내 삶에 행복을 주는 샘과 같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절묘하게 내 설 자리를 찾으면, 고요하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