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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아빠로살아가기

아빠의 70번째 생일

카멜리아에서 바라본 해운대

아들과 둘이서 부산으로 향했다. 아빠의 70번째 생일. 코로나 때문에 어떻게 이번 생일을 보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동생
가족이 다 부산으로 내려와서 생일을 같이 보내기로 하면서, 제법 왁자한 생일을 보낼 수 있었다. 직계가족 모임의 경우에 8명 제한이 있어서 일단 나만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 내외, 누나, 엄마, 아빠가 모두 접종을 받으면서 인원 제한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동생은 해운대 웨스틴 조선 호텔 뷔페 카멜리아에 예약을 해두었고, 토요일 밤에 만나서 가족끼리 회포를 풀었다. 누나와 동생도 일 년만에 처음 보는 것. 나는 누나와 동생을 본 게 더 오래 되었다. 코로나가 극성부린 딱 그 기간에 서울, 인천이라는 먼 거리까지 더 해서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이제 상황은 분명 더 나아지겠지?

어제 아이들도 어른들도 늦은 시간까지 깨어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는 느긋하게 일어나서 뷔페를 준비를 했다. 아침을 안 먹겠다는 사람, 아침을 먹어야 한다는 사람. 외출 준비를 마치고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고 노래도 부르고 사진도 찍었다. 웃으며 사진을 찍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아빠나 엄마의 표정이 마냥 기분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내 기분 탓일까.

어른 6, 초등학생 3이 식사를 했는데, 70만원 넘는 돈이 나왔다. 아빠 생일인데, 아빠가 계신했다. 나는 이런 호강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 좀 과하게 열심히 먹었다. 잠시 해변으로 가서 아이들은 모래 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그냥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누나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으로, 동생가족은 ktx를 타고 서울로, 우리는 차를 타고 진주로.

아빠의 70번째 생일은 뜻깊고 소중하지만, 생일은 단 하루 뿐이다. 마치 일년 동안의 그리움을 하루 만에 만회 해보려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열심히 먹고, 마시고, 이야기했지만, 엄마, 아빠는 늘 남겨져 있는 기분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가장 건강한 모습은 아빠가 36살 때였다. 그때 나는 10살이었다. 아빠는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다부진 체격이었다. 내게 아버지는 지구를 들어올 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10살 아들에게 전지전능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신이 아니라 아버지. 아빠는 우리와 제법 잘 놀아주는 편이었다. 클리셰 같지만, 아빠 월급날에는 비닐봉지에 담아온 삼겹살을 가족들이 모두 맥반석 위에 구워 먹었다. 아빠는 소주도 막걸리도 잘 마셨다.

내가 자라면서도 아빠는 그 건강함을 잃은 적이 없다. 늘 힘쓰는 일을 하신 까닭에 손가락 끝의 살이 잘려 나가거나, 쇳물 녹이는 불똥이 몸에 튀어 화상을 입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불끈불끈 일어나서 또 돈을 벌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직도 아빠는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아빠에 비하면 나는 정말 약골 아닌가.

아빠의 칩실 생일이 되고 나니 이제는 아빠의 건강이 염려되어 나는 죽을 지경이다. 크게 아픈 데는 없지만, 자잘하게 아픈 게 쌓이는 게 나이듦의 얼굴 아닌가. 아빠가 노인이라고 불려야 하는 나이에 진입한다는 데에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80까지, 90까지, 100세까지 사는 인생이라는 데, 나는 조바심이 난다.

내 건강 챙길 나이가 되어서야 부모 건강이 염려되는 인간이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내년의 생일, 내 후년의 생일은 어떤 모습일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안절부절한다. 나 키우느라 보낸 아빠의 젊음에 나는 감사하면서도 그만큼 죄송스럽다. 내 아들과 딸에게만 사랑이 향하며 내리사랑이라며 변명하지는 않았나 나를 혼낸다.

아빠는 세상이 우러러 보는 재물도 학식도 이루지 못했지만, 소중한 가족을 나름 잘 가꾸어 왔다. 아빠는 가족을 꾸리고 가족을 위하는 데 소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가족을 향해서 그런 소질을 가지고 있나 없나 모르겠다. 아빠의 소질을 좀 물려 받았겠거니 일단 생각하는 게 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