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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Stuff

38317과 삐삐

By Thiemo Schuff - Own work,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6495087

 

식사를 하고 학교 한 바퀴를 돈다. 이번주에는 내내 따뜻한 날이 이어지고 있어서 걷기에 좋지만, 잠시만 걷고 들어가야 한다. 학교에는 여러 선생님이 있고, 참 많은 나이차가 나는 선생님들끼리도 서로 존대하며 이야기한다. 선생하기 좋은 때는 나이를 떠나서 좋은 동료를 사귈 수 있을 때이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까? 삐삐 이야기가 나왔다. 내 기억에 나는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삐삐를 사용했던 것 같다. 부모님께는 알리지도 않고 용돈으로 샀었던 것 같은데, 그 용돈은 도대체 어디서 구했던 것일까? 그다지 급한 연락도 없었는데, 그때 나는 삐삐로 누구와 연락을 주고 받았을까. 

어쨌든 그때 삐삐는 없으면 안되었고(지금 학생들에게 휴대폰은 더 중요하겠지), 서로 연락하는 일이 없더라도 삐삐번호는 교환하는 때가 있었다. 다른 학교 동아리 여학생들을 만나거나 할 때 말이다. 그 당시에는(?) 수줍음이 많은 편이라 학원에서 오래 알고 지내던 여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이야기를 하거나 연락처를 줬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삐삐가 필요하긴 했었나 보다. 

작은 삐삐를 주머니에 넣고 괜히 만지작 거리고, 별 쓰잘데기 없는 메시지라도 오면 기분이 좋았다. 고등학교에 공중전화가 2대인가가 있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용감하게 공중전화로 가서 삐삐에 온 음성메시지를 확인하거나, 호출된 번호를 보고 연락을 했다. 음성메시지가 오면, 삐삐에 (+1) 이런 식으로 표시가 되었다. 내 삐삐 번호를 누르고, 음성 확인 메시지를 선택하면, 누군가가 남긴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휴대폰에서 음성메시지 서비스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 즉각적이고 동시적인 음성 교환만 살아남은 시대다. 그런 음성 메시지 덕분에 하기 힘든 말, 혹은 하기 싫은 말, 혹은 직접 귀에 대고 하기 부끄러운 말도 많이 했을 것이다. 대개의 학생들은 야자 시간을 이용해서 공중전화로 달려갔고, 공중전화를 쓰기 위해서 전화카드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빌려주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고. 

나도 지갑에는 학생증, 약간의 돈, 학생용 회수권(버스 승차권), 공중전화카드를 가지고 다녔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어야 했을 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가지는 것에 나도 관심을 가졌었다. 

삐삐 얘기를 하니, 그때 사용했던 숫자 암호가 생각났다. 딱 하나 뿐인데, 38317. 삐삐에 표기된 저 숫자를 뒤집으면 LIEBE 가 되는데, 저런 걸 만들어 내는 천재적인 재능은 어느 시대에나 어디에나 있었나 보다. 

그 많던 삐삐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삐삐에 얽힌 내 추억은 좀 천천히 지워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