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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우주의 변두리라 좋은 점 (feat. 장보기와 코로나)

장바구니와 나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바로 장을 보러 갈 생각은 아니었다. 너무 추워서 다시 나오기 싫을 것 같아서 장을 보러 갔다. 요즘 내 옷차림은 거의 똑같다. 방풍바지, 반팔티, 파타고니아 신칠라 스냅티, 프리마로프트 소재의 긴 외투, 버킷햇. 장을 보러 들어가서 혹시 '얼굴이 안 보여서 기계가 열을 잘 못 재는 거 아닌가?' 생각하는 사이 "정상체온입니다." 

곧장 신선제품, 가공식품 코너로 간다. 두부 살펴보고, 햄 살펴보고, 고기 살펴보고. 헉, 파프리카 2개가 4000원. 점심은 아들이랑 우동이다! 저녁에는 두부 요리. '연두?' 좋아 보인다. '계란 간장'? 샘표가 일을 열심히 하는구나. 생야채도 먹여야 하니 파프리카 덥석. 집에 우유가 잘 안 나가니 '재티'도 겟. 토요일 아침에는 유부초밥이 딱이지. 꼬마 유부초밥. 과자도 하나. 순두부 양념. (순두부를 안 샀다. 내일 다시 가야) 

 

집에 요리책이 몇 권 있고, 가끔 본다. 트위터로 유튜브로 가끔 레시피를 챙겨놓지만, 선뜻 따라하게 되지는 않는다. 올 겨울 코로나가 확연히 자취를 감추지는 않을 것 같고, 어쩌면 어쩌면 나는 직장으로 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혼자 집에서 밥을 차려 먹게 할 수도 없고, 온라인 수업 깨작거리면서 '심심해'하면서 지내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다. 나는 적어도 오늘부터 '주부 모드'로 돌입한다. 엊그제부터는 집안일에 좀 박차를 가했다. 

내가 처음 육아휴직을 할 때는 "실제로 남자가 육아휴직하는 건 처음 봐요."라는 반응이 제법 있었다. 그리고 내 뒤를 이어(?) 내가 일하는 곳에도 육아휴직을 하는 남자분들이 나타났다. 나는 두 번의 육아휴직을 했고, 처음 할 때보다 두 번째는 더 쉽고 더 재미가 있었다. 그 재미는 집안일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래, 그럴 수는 없다. 남자는 조금만 열심히 집안일을 해도 모두 칭찬해준다. 그런 점에서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은 다행이지 싶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의 피곤함은 피해갈 수 없다. 웃기고 혼내고 달래는 일의 뿌듯함은 대신 온전히 내 것이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내가 '주양육자'가 되었고, 아이들은 금세 적응했다. 뭐든 내게 물어보고, 뭐든 내게 요구했다. 한데, 또 하게 되면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추석 연휴 고향에 가지 못하니 추석 같지 않더라. '할 일'이 없어도 놀러 갈 곳이 없으니 그게 뭔가. 오로지 집에 갇혀 있어야 한다면, 그걸 내가 잘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애들 먹이고 입히고 가끔 공부까지 가르쳐야 하는 데 대해 고민해야 하는데, 그건 '하면 되는 일'이다. 우리를 힘들 게 하는 일은 대개 '해야 되는 일'이다. 그 일을 하기 싫으면 마음이 괴롭고, 곧 몸도 괴로워 진다. 그 일을 해야 하는 시간에, 해내야 하는 만큼 하지 못하면, 주변까지 힘들어진다. '내가 일하지 않음' 덕분에 관계가 힘들어지기도 한다. '사회에 이바지하네', '자아실현'이네 아무리 떠들어도 사람들이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돈이나 쓰면서 살고 싶다'라고 하는 이유는 결국 '해야 하는 일'이 주어지고, 나는 그 일을 넙죽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 그렇다고 일 하는 게 힘들다는 게 아니다.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들다. 해야 하는 일은 하기만 하면, 내가 알아주고 남도 알아본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면, 남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나는 무지 괴롭다. 다니엘 캐너만은 그의 책 '생각에 대한 생각'에서 여러 실험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것을 빼앗기는 것'을 못 견뎌 한다고 했다. 그가 사용한 예가 재미있다. 당신은 마트에서 물건을 다 사고 이제 집으로 가려고 한다. 차로 다가간다. 그때 어떤 차 한 대가 당신이 차 문을 여는 것을 보더니 비상 깜빡이를 보고 당신이 차를 빼기를 기다린다. 이때, 보통의 사람은 '내가 차지한 주차 자리'를 빼앗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갑자기 행동이 굼뜨고 '너한테 자리를 주기 싫어'하는 마음이 된다고. 아, 코로나 시대에 휴직하면 '누군가가' 나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없다. 그저 상황이 내가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앗아 가겠지. 

아침 수영 수업, 수영 마치고 머리도 안 말린채 타는 자전거, 설거지만 하고 나가서 즐기는 브런치, 아이들이 마치기 전까지 잠깐 지속되는 혼자 책 읽는 시간. 만약 올해 휴직을 하게 되면, 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코로나 시대에 어떻게 수업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제 열심히 적응을 했는데, 새로운 도전이다. 새로운 막막함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쓰다보니 투정 같다. 올 한 해 세상의 많은 어머님들이 해온 일이고, 또 많은 분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휴직에 대한 이야기이기는 하다. 누가 투정이라면 어쩌겠나. 나에게는 투쟁인데.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우주의 중심이 나인 줄 알았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쳐다볼 것 같았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고, 서른 쯤 되니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흔이 넘은 지금은? 그러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에, 다른 사람의 판단에 신경 쓰며 산 날이 너무 많다. 이제 내가 지켜줘야 할 타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잘 파악했다. 오징어 놀이를 할 때, 먼저 내가 발을 디딜 수 있는 곳과 아닌 곳이 잘 보이게 운동장에 선을 잘 그어야 하지 않나. 마흔이 넘으면 이제 '나인 것, 나 다운 것, 내가 원하는 것'과 '그거 빼고 다'를 구분하는 선이 제법 선명해진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내 마음대로 좀 한다고 해서 우주에 문제 따위는 발생하지 않는다. 

코로나가 온 지구를 위협하며, 그래서, 결국, 당연히 내 나와바리까지 침범하고 있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코로나 블루 아닌가. (내 글에서 벌써 두 번째 코로나 블루를 언급하고 있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적응해 나가겠지. 코로나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급격한 변화에도 웅크리고 맞서고 변화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작년에 제법 잘 해왔으니, 올해에도 제법 잘할 수 있지 않을까가 아니라, 더 잘해야지. 

글을 읽어준 당신에게, 

누구시든, 당신은 우주의 중심이 아닙니다. 당신이 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우주의 질서를 흐트러지지 않아요. 그러니 어떻게? 원하는대로 하세요. 저도 그러려고 하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