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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우리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얼마나 필요할까?

 

 

자전거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본 눈썹달 

 

오늘도 밖으로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겨울에만 바람이 센 건지, 내가 자전거를 타려 할 때만 바람이 센 건지, 아님 내가 힘이 약해 바람은 모두 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바람 덕분에 한 시간 정도만 타도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어.'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확보했다. 나 혼자일 수 있는 시간.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도대체 얼마나 필요한 것일까? 군대에서 바다를 보며 경계 근무를 할 때에는 정말 나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 대체로 하는 일이 3교대로 돌아가며 바다를 쳐다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배들이 자주 지나가서 제법 바빴지만, 새벽 시간은 정말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같이 근무서는 선임이 작은 격실로 들어가서 잠에 들면 더 조용했다. 그저 찬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며 별을 세면 되었다. 정말 원 없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군대 있던 시절이니 당연히 밖을 보며 그리운 것들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은 결국 사춘기에 했었으면 좋았을 '나는 누구인가?' 따위까지 이어졌다.

학기 중에 차로 출퇴근 하고, 학교에서 바쁜 하루를 보내다 보면 혼자 있는 시간이란 거의 없다. 유일한 시간은 샤워하는 시간도 아닐까. 그마저도 아들이 와서 같이 샤워하자는 경우가 많아서 방해받기 일쑤였다. 잠자는 시간 동안 혼자일 수 있었다. 잠자는 동안도 생각할 수가 있다. 뭐든 가능하다. 잠들기 전에 생각을 하다 보면, 잠을 자고 나면 그 부분에 대해 내가 밤새 약간은 더 생각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저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르지만. 

진주는 아름답다 

학교에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은 시험 감독할 때이다. 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나눠주고 학생들의 움직임을 살피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대개 학교에서의 일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기는 한다. 근무시간이니 그 시간 동안에는 공상 속에서도 일을 하는 시간이 많다. 시험이 끝나면 무슨 수업을 해볼까, 내년에는 어떤 평가를 해볼까 이런 생각. 학생들의 정수리만 보면서 연필이나 볼펜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그만큼 좋은 ASMR이 없다. 생각도 잘 된다. 

자전거 타는 동안은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 지만 살피면서 생각을 할 수 있다. 아주 빨리 달리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머릿속으로는 다양한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러려면 일단 너무 춥거나 더우면 안 된다. 춥거나 더우면, 오로지 그 생각만 든다. 배가 고파도 안된다. 오로지 배고프다는 생각만 든다. 그리 보면 나란 사람은 생각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싶기도 하다. 

오늘 자전거를 타면서는 앞으로 일부러 앞으로 근무하게 될 지도 모를 학교로 방향을 잡았다. 목적지를 잡아야 생각하기가 좋다. 목적지가 없이 그냥 나가면 결국 생각한 것보다 더 일찍 돌아오게 되고,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고민을 해야 한다. 오늘은 주로 무엇에 대해 글을 쓸까 생각했다. 움직이는 범위가 좁고 하루 종일 아이들과 지내다 보니 다른 생각할 틈이 없다. 그저 삼시세끼 해 먹고 아이들과 뭐 하며 시간을 보낼지 생각하게 되었다. 

요긴한 글쓸 거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 집으로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해가 기울어서 하늘은 선물 같았다. 코가 시리긴 했어도 몸은 적당히 데워져서 힘이 났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손톱달이 수줍다. 저렇게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달도 손톱만큼 남아 하늘을 밝힌다. 나는 갑자기 내 잘못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작더라도 내 잘못은 내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우주가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돌아간다면 내 앞에는 많은 벌이 남았을까, 많은 상이 남았을까. 일단 우주는 인과응보로 진행된다고 믿지는 않지만, 새로운 잘못을 해나가서는 안될 텐데 생각했다. 

사람이 갖게 되는 '옳다'라는 개념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 것일까? 출생과 보육의 과정에서의 훈육이 그 이유일 수도 있고, 사회적 인간으로 태어나고 죽고 태어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DNA에 새겨져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옳다는 개념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며, 그로서 자신이 가진 관념과 행동의 일치를 맛본다. 그러한 관념과 행동의 일치에서 우리는 만족감을 느끼고, 스스로 올바른 존재로 살아간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우리 삶의 뿌리는 생각이고, 그 생각에서 나타난 행동의 합이다. 그게 우리의 지평이 되어 준다. 아들이 졸라서 장수풍뎅이를 분양받아 키운 적이 있다. 그래서 장수풍뎅이에 대해 글을 좀 읽어봤는데, 좀 놀라웠던 게 있다. 사육장은 톱밥을 깔고 물을 뿌려주면 되었다. 장수풍뎅이는 톱밥 아래로 들어가 은신하는 일이 많지만, 은신을 위한 장난감도 필요하다고 했다. 놀라웠던 점은 '딱딱한 나무 장난감'이 필요한 것이었다. '놀이목'. 단단하여 장수풍뎅이가 딛고 일어나고 장난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장수풍뎅이는 제대로 살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의 성장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순간을 꼽자면, 두 발로 일어나 걷는 순간이 될 것이다. 엄마 배속에서 나고 자라는 데에는 어떤 의지나 투지, 노력을 드러내기가 어렵다. 인간이 세상에 나와 처음 이룩하는 대단한 위업은 바로 두 발로 일어서는 일이다. 세상이 모두 축하한다. 중력이 없는 우주 공간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런 '두 발로 일어서기'가 가능할까. 내 일상에서 가장 단단한 믿음. 그것이 내가 디디고 설 수 있게 해주는 건강한 땅이 되어 준다. 그 땅을 어떻게 다지느냐에 따라 건강하게 자라고 걷게 될지 아닐지가 정해진다. 내가 디딘 땅은 얼마나 굳건한가. 고민이 많아지는데, 눈썹달을 만났다. 

생각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으니, 내일도 자전거를 타고 나가야 겠다. 충분히 생각하려면, 자전거에서 내릴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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