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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신독의 자세와 턱수염

남해 작은미술관

다시 수염을 기르고 있다. 방학이 시작되고 면도를 하지 않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턱수염을 자르지 않고 있다. 콧수염은 면도하고 있다. 두 해 전에, 콧수염도 턱수염도 모두 길러보려고 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나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그냥 두자. 아무튼 한 달 정도 기르니 제법 수염 기른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면 수염을 공들여 닦아줘야 했다. 그런데 콧수염은 불편했다. 특히 음식을 먹을 때. 커피를 마시는 데도 편안하게 마실 수가 없었다. 올해에는 그래서 콧수염은 면도하고 턱수염은 길러보고 있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 늘 마스크를 하고 있으니 사실 내가 턱수염을 기른다고 하더라도 누가 쉽게 알아보기 힘들다. 눈썹이나 속눈썹을 기르지 않는 이상 마스크 쓴 나의 턱수염을 누가 알아보겠나. 그래서 좀 편히 턱수염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코로나가 턱수염의 ‘원인’일 수는 없다. 마스크에 가리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된 것 뿐이다. 면도는 칼날로 수염을 잘라낸다. 하지만, 피부에 붙어 있는 수염을 자르는 일은 피부의 일부와 수염의 대부분을 긁어 내는 것과 같다. 여전히 면도 할 때 아프다. 콧수염쪽 피부는 덜 그런데, 턱수염은 정도가 좀 심하다. 턱을 따라 굴곡이 있어서 아무래도 힘을 좀 더 주고 밀게 된다. 면도를 해도 오후 5시가 넘어가면 다시 수염이 올라오는 것 같다. 피곤한 얼굴에 수염은 그림자를 더 드리운다. 그렇다.

이쯤되면 수염을 기른다기 보다는 턱수염만 면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그리고 지금 턱수염 면도를 하지 않은 지 3주 이상이 되었고 마스크를 벗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내 검은 턱을 봏게 된다.

하루 종일 별로 한 일이 없어서 오늘은 무엇에 대해 글을 쓸까 생각하다가 마스크와 턱수염으로 생각이 옮겨갔고, 내가 중학교 때 좋아했던 신독에 대해 생각했고, 로빈손 크루소까지 그 생각은 이어졌다.

로빈손 크루소를 읽지는 않았지만,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톰행크스의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포레스트 검프에서의 모습이나 캐스트 어웨이에서의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구나. 아무튼 머리도, 콧수염도, 턱수염도 길게 긴 모습이었다. 혼자 무인도에서 살아남은 로빈손 크루소도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바다에서 만약 면도기가 떠내려왔고, 거기에 면도크림까지 발견했다면 로빈손 크루소는 면도를 했을까? 매일 했을까?

한번 하기는 했을 것 같다. 다시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문명의 세계로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하지만, 매일 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어쩜 더 철저히 문명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이 인간세상에서 하던대로 면도를 했을 수도 있다. 이건 면도가 인간이 당연히 아침이면 일어나서 해야 하는 행동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려준다. 고로 나를 봐줄 어떤 다른 사람이 없다면, 면도는 오로지 나를 보는 나를 위한 행동이 된다. 내가 나를 볼 수 없다면? 면도는 수염을 자르는 행위라기 보다는 문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기원의식에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중학교 때 (아마도 도덕시간에) 처음 신독이라는 단어를 들었고, 그 뜻이 너무나 마음에들었다. (또 좋아했던 단어로는 ‘전인’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감.

교과서에서는 정확히는 신독의 자세라고 썼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늘 신독의 자세를 갖춘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중학생 때다. 나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고, 포부는 크던 시기다.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그때 중학생이 바라던 모습에 얼마나 가까운 지 모르겠다. 중학생 때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면도는 좀 매일 하세요.’ 라고 할 지 모르겠다.

사람이 인간성을 유지하려면, 사회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른 새벽에도 빨간 불을 보면 멈출 수 있어야 하고, 떨어진 돈을 주우면 그냥 그 자리에 두거나 파출소에 분실물로 신고해야 한다. 깨끗하게 씻고 단정하게 옷을 입어야 하고, 적당히 먹고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늘상 지키던 질서를 어기고,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은 홀로 되었을 때, 무한하게 자유로워 진다. 오로지 나만이 나를 감시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나에 대해 경찰이 될 수 없다. 내 잘못에 대한 합당한 처분을 생각하면, 이는 사회성에 기반해야 마땅한데, 아무도 없는 곳이라는 상황이 나를 너무나 자유롭게 한다.

내 잘못을 나만 알고 있다면, 내 잘못에 대한 처분은 내가 나에게 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 처분이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마치 내 안에 여러 인격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더라도, 결국 나의 목표는 나의 안위이다.

스스로를 벌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내 잘못을 꺼내면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사회가 정해주는 처벌에 순응하면 된다. 누구나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있을까.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과 정의로운 사회를 원할 지 몰라도, 내가 언제나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른 사람의 죄는 다 모르지만, 나의 죄는 내가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내가 저지른 잘못도 남이 보는 데 꺼내어 바싹하게 눈총으로 말릴 용기를 가지기는 쉽지 않다.

신독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차 몸과 마음 가짐을 바로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높은 인간성을 드러내는 아주 조용한 방법이다. 굳이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신독의 자세연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다시 면도로 돌아가자. 수염을 기르는 것은 잘못도 아니고 그릇된 몸가짐도 아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일어나 깨끗이 씻고 인간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 앞에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면 몸과 마음을 거울에 비춰보는 일은 중요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세수하고 샤워하고, 깔끔한 옷을 꺼내어 입는 과정.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의 그 과정에 적잖은 공을 들이고, 거기에서 신독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외로이 혼자서 살지 않기 때문에 내가 기꺼이 공들이는 부분, 루틴, 의식. 우리가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있고,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준다. 혼자가 아니라 덜 자유롭지만, 혼자가 아니라 덜 외로울 수 있겠다.

내일도 콧수염은 잘 면도해야지, 턱수염에 묻은 물은 잘 닦아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