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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런 일은 없다. 세상에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 딸의 눈을 쳐다보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랄까. 쳇, 그것도 나 대신 할 놈이 10년 후쯤에는 나타나려나...

아무튼 나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대학교 남자 동기들의 곗돈을 관리하고 있다. 역시나, 나에게도 무리가 되는 일이었다. 자동이체 하고 꾸준히 돈을 내는 친구, 몇 번 내고 안 내는 친구, 몇 번 내고 쉬다가 내는 친구. 이런 놈들 덕분에 계산이 아주 복잡해졌다. 그리고 중간에 두어번 만나서 회비라는 이름으로 돈을 또 썼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지났다.

퍼니셔 영웅이라면 이 정도 외모는 되어야??

몇 안되는 동기인데, 그 중에 넷이 진주에서 만났다. 친구 가게에서 커피를 한 잔 하고, 자리를 옮겨 밥을 먹었다. 이런 저런 우스개 소리하며 시간을 죽이고, 재미를 찾고, 추억을 우려냈다. 그게 재미지. 그러다가 이제는 정말 제대로 를 해보자라는 예상치 못한 하지만, 분명한 결론에 이르렀다.

대재앙으로부터, 외계인의 침략으로부터 한 몸 불살라 지구를 지키는 유일한 영웅이라도 된 듯, 화성에 혼자 남아 똥으로 감자를 키우려는 과학자가 된 듯, 곗돈을 계산한다. 덜 낸 건 넘어가자, 더 먹은 건 처리하자, 남는 돈은 돌려주자. 대강 대충 얼렁뚱땅, 하지만, 누구도 큰 피해는 없도록 계산한다. 그리고 잔금 0을 만들어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돈을 잘 내온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고, 입금해줬다. 이렇게 끝.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집에 와서 엑셀 파일을 열고, vlookup 을 써야 하나, hlookup을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에헤이, 뭔 소용인가 그냥 사칙연산으로 해결하자 하며 끙끙대는 나. 그런데도 묘하게 나도 설득된 것 같다. 그렇지, 이 일을 할 사람은 나 뿐이지.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맨맨맨. 어떤 맨이든 자각의 순간이 있고, 대개 그 에피소드가 제일 재미있다. (그래서 배트맨 시리즈 중 최고는 다크나이트) 자신의 힘이 주는 희열감, 거기서 비롯되는 인기나 존재감은 영웅을 초라하게 만든다. 방황하게 만든다. 자신의 힘을 어디로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결정하고 받아들이고 주어진 힘보다 더 거대한 책임을 등에 짊어지는 순간, 영웅이 된다.

나는 영웅 따위는 될 수 없지만, 작은 일을 하더라도 책임에 대한 자각이 있으면 같은 일도 다른 일이 된다. 스파이더맨이 영웅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자기가 하는 일에 책임을 느끼고 책임을 기꺼이 선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저나, 이제 곗돈 좀 잘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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