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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아빠로살아가기

데자뷰의 순간 : 내 책장에 접근하는 아들

데자뷔라는 현상이 있거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들이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여러 사람이 비슷한 현상을 경험했고, 그걸 이야기하다 보니 지칭해야 할 단어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미래를 보지 못하고 오로지 과거를 회상할 뿐인데, 과거에 했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정말 우리가 같은 일을 거의 같은 상황에서 두 번 하는 것일까? 데자뷔는 낯선 상황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이미 했던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우리 뇌의 속임수라는 글을 읽을 적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불안하거나 부정적인 상황에서만 데자뷰를 경험하게 되지 않으니 그 설명은 반 정도만 맞는 것은 아닐까?

매트릭스에서 빨간약을 삼킨 네오는 매트릭스로 들어갔다가 데자뷰를 경험하게 된다. 복도 한쪽에 있던 검은 고양이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지나가는 것. 매트릭스 안에서의 데자뷔는 시스템의 결함이나 이상 징후였고, 곧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무결한 시스템에서라면, 완전히 동일한 일이 두 번 발생할 수 없다. 같은 시간은 반복될 수 없다.

꿈속에서의 꿈은 늘 구체적이고 내 오감까지 충족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 기억해보려고 애쓰면, 꿈은 허점 투성이다. 전개는 개연성이 없고, 설정은 엉성하다. 데자뷔는 꿈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내가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의 전개를 경험하게 되는 것. 이 상상은 반드시 의식적인 데다가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어도 된다. 아주 짧은 순간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조합이라도 우리 의식을 거친 다음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때,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것이라고 착각한다.

“임용합격하면 뭘 사고 싶나?”라는 질문을 친구들과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자주 “지금 제일 먹고 싶은 게 뭐꼬?”라고 물었고, 후배들을 만나면 꼭 “집이 어딘데?”라고 물었다. 그 친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를 기억했고, 후배들이 어느 동네에 살아서 누가누가 가까이 사는 지를 꿰고 있었다. 그 질문들을 진심으로 하는 녀석이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답을 쏟아낸 것 같은데, 나는 아마도 “자동차, 선글라스, 책”이었던 것 같다. 생필품만 살 수 있었던 시절이라, 생필품이 아닌 것을 사고 싶었다. 임용에 합격하고 결국 출퇴근을 위해 차를 사게 되었고, 여름에는 썬글라스를 샀다. 그리고 마치 다 이룬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어른이 되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도 아주 많이 상상했다.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정장을 갖춰 입고, 머리는 반듯하게 넘기고, 중형 세단에 올라탄다.라는 클리셰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언제부터 상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아이가 내 책들을 뒤적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마도 소설 책도둑을 읽고서가 아닐까 싶다.

아들은 내가 없는 방으로 들어와서 ‘아빠는 왜 이렇게 재미없어 보이는 책만 읽을까?’ 생각하면서도 책장을 뒤적인다. ‘아빠가 읽는 책이 궁금하다’고 생각하며, ‘아빠의 비밀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리고 몇 권의 책을 뺐다 꽂았다 하다가 책 하나를 고르고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끝까지 읽기 시작한다. 그런 상상을 했다.

우리 집에는 오로지 나를 위한 책꽂이는 이케아 빌리 책장 80x20x202 cm 두 개 밖에 없다. 그러니 오롯이 내 마음대로 조직할 수 있는 책은 400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책을 채워 넣다가 이제는 이 두 개의 책장에만 중요한 책들을 남기려고 애쓰고 있다. 이 책장에서 밀려난 책들은 집 구석구석 작은 공간 틈을 차지하고 있다. 이 책장에 꽂힌 책들은 아주 떳떳하게 읽혀야 할 책임을 선전하고 있다. 안방으로 들어서면 침대옆 책장이 단연 눈에 띈다. 잠시만 시간을 보내면, 아직 읽기 못한 책들을 찾을 수 있고,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의 책등에 손이 간다.

내 책을 얻어보는 아들

어제는 침대 머리맡 책들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는 데, 아들은 쓰윽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가 쓰고 있는 글을 보더니, 침대 머리맡에 있는 책들을 살펴본다. “소년의 심리학” 내가 아들을 이해해보려고 쓴 책인데.. 아들은 책을 집어 들더니, 착착착 넘기며 내가 밑줄 그은 것들을 먼저 읽는다. 이때부터 나는 마음속으로 이 장면을 사진 찍기 시작한다. “바로 내가 상상하던 장면이야! 행복한 데자뷔!!” 곧 아들은 목차를 천천히 읽기 시작하고, 이쯤 되면 나는 행복에 겹다. 자기 이야기인 듯한 제목을 찾았는지 재미있다며 읽기 시작한다. 시간은 9시가 넘었고, 아들은 자러 가야 하는 시간이었는데도, 조금만 더를 외치며 읽는다. 몰래 아들 사진을 찍었다. 아들이 내 책장에 들어와준 첫날이다. 매 번의 첫날은 기념할 만하고, 이번 사건은 특히나 내게 중대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려온 마음 속 작품을 눈에서 보게 된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아들을 지켜봤다. 아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들도 나를 다른 방식으로 알아갈 수 있겠구나. 과거의 나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만, 잘 준비해둔 400권의 책은 아들을 초대하는 데 성공했고, 내가 상상했던 것 같은 풍경을 만들어 냈다. 오늘의 행복한 데자뷔.

이제, 책장을 하나 더 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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