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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고향 부산 나들이와 모교인 엄궁중학교

어제는 오랜만에 부산집에 갔다. 진주에서 부산까지 운전해 가는 길이 낯설었다.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는 부산 집에 가서 자고 온 적도 없다. 거의 1년은 가지 못하고 내가 잠시 반찬이나 가지러 간 게 다 였던 것 같다. with 코로나 시대가 온다는데, 그럼 이제 가족끼리라도 좀 더 가까워지는 건가. 달아나버린 2년의 시간은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가 없다. 마치 늘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말들하지만, 현재를 보람차게 켜켜이 쌓지 못하면 미래는 그저 빛좋은 수사일 뿐.

아직도 코로나 때문에 부산집에 가도 돌아다니지 못 한다. 아파트 놀이터가 있지만,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으면 거기에도 가지 않는다. 1시간 30분 차를 타고 도착해서, 또 집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아이들로서는 견디기 힘들 게 분명하다. 움직이고 움직이고 또 움직여야 하루를 제대로 보낼 수 있는 아이들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다니던 학교에 가보자고 했다. 아들은 학교 근처라면 문구점이 있을 것이고, 그 문구점에서 포켓몬 카드를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따라나서는 것 같았다. 딸은 그냥 집에 있기 심심하니까, 나를 따라가고 싶으니까 따라 나섰다. 어제 아침에는 딸만 데리고 진주 롯데몰에 가서 운동화를 사줬다. 이후로 하루 종일 내 껌딱지.


르꼬끄에서 산 딸의 신발

딸은 물건을 참 잘 고르더라. 자기가 좋아하는 색에 약간 반짝이는 포인트가 들어간 신반들만 잘 찾아냈다. 신고 벗고 1층에 갔다가 3층에 갔다가 하는데도 피곤해 하지 않았다. 덕분에 비싸기는 했지만, 이쁜 신발을 샀다. 다른 집에서 받은 약간 큰 운동화들이 집에 가득하지만, 나는 딱 맞는 예쁜 신발을 신기고 싶다. 그래서 이 신발은 내 용돈으로 구입. (딸, 알아줘야 해.) 아내는 운동화가 있는데 왜 사냐지만, 운동화 한 켤레는 부족하다.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는 딸의 신발 크기는 190이다. 이제 아기아기한 신발을 신을 수도 없고 곧 쥬니어다. (눈물) 딸은 새로산 신발이 아깝다고 아무 데도 신고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엄궁중학교


하지만 딸은 새 신발을 신었다. 아들은 문구점을 기대하며, 딸은 그냥 나를 따라 내가 다니던 학교로 갔다. 지금 부모님 집에서는 아주 가깝지만, 예전에는 20분 이상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가끔 버스를 타는 학생도 있었지만 그때 중학생들은 모두 걸어다녔다. 나도 그랬고. 집으로 갈 때는 늘 뛰어서 갔다. 3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학교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외벽이 좀 세련되게 바뀌었고, 증축을 해서 강당이 생겼고, 모래바람 날리던 운동장이 인조잔디구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체육시간 가끔 반별로 씨름을 했던 씨름장은 없어졌고, 체육선생님들의 교사실과 체육실도 없어졌다. 청소시간이면 친구들과 밀대걸레를 빨던 대형 빨래터(?)도 없어졌다. 그리고 소각장(학교에 늘 소각장이 있었구나. 그랬다.)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햇볕을 못보는 건물 1층은 음침했다. 오르막에 지은 이 학교는 운동장이 건물의 2층 높이였다. 그래도 학생들이 뛰어다니면 학교는 늘 생기가 있었다. 지금은 공학이겠지만, 내가 다닐 당시에는 남자중학교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건물을 보니 반가웠다. 고마웠다. 무슨 대단한 산도 아니고,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간직한 곳도 아니지만, 내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 사이에도 별로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변하는 것들에게는 기준이 된다. 우리가 부모님의 집을 원점으로, x축을 따라, y축을 따라 이동하다가도 어깨 뒤로 부모님 집을 진짜 집으로 오랫동안 체감하는 것과 같다. 모교라는 공간은 다시 찾아와야지, 언젠가는 돌아와야지 하는 장소도 아닌데도 고맙게 생각되었다.

우리는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고, 글로 상세한 역사를 기록할 수는 있지만, 실제 건물처럼 추억 전체를 환기시키지는 못한다. 어떤 학교가 폐교되거나 이전에 대한 의견이 나오면, 왜 사람들이 반대하는 지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추억을 증거가 될 공간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닐까. 무슨 무슨 터…로 남아서는 부족하다.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와도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을 뵙기가 어렵다. 3, 4년만에 찾아오는 학생이라면 만나게 되는 때도 있는데, 학생들이 하는 얘기는 대개 “선생님,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이다. 그럴리가 없지만, 자신들이 거울을 통해서 목격하게 되는 자신의 변화에 비하면, 선생님들의 변화란 기미도 알아차릴 수 없는 정도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마치 파도에 떠밀려 등대에 올라선 것처럼 갑자기 정신이 들고, 두발 딛고 선 느낌을 갖는다. 천천히 변하거나,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나 건물이 줄 수 있는 효능이다.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중학생

이렇게 굳건한 추억의 장소를 사진으로 찍고, 친구들에게 보내고 싶다 생각했는데, 보낼 공간이 없다. 단톡방이 하나 있었으나 나는 나왔고, 예전에 가끔 글을 쓰기도 했던 프리첼은 유료화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자주 연락하는 중학교 친구도 없다는 걸 기억하게 된다. 친한 친구란 버스와 같지 않느냐고 쓴 한 트위터 사용자의 글을 봤는데, 일견 훌륭한 관찰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사람을 챙기지 못하는 나의 게으름에 문제가 없나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란 지나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기회는 적어진다. 그게 본래 그러한 거 아닌가 싶기는 하다. 내가 사는 우주는 팽창의 시간을 지나온 듯 하다. 뭐든 갖고 싶고, 뭐든 확장하고 싶었던 때를 나는 지나온 게 아닌가 싶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 생각했던 때가 아마도 그러한 때였으니,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사랑받으면 된다. 얕고 넓었던 사랑은 깊이를 더 해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해질녘 모든 사람을 비스듬히 깍아내는 햇볕도 좋았고, 땅을 부술 기세로 달리며 공을 차대는 학생들의 기운도 좋았다. 돌아보면 나를 보는 내 아이들과 함께라서도 좋았다. 세상에 좋은 게 투성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나도 좋다.

고등학교는 좀 멀긴 한데, 다음에는 거기도 한번 가보고 싶기도 하고. 단, 중학교보다 더 횡하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