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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연민



우리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보복, 즉 응보적 정신으로 징벌을 바라보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비판한 태도이며 이는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섬뜩한 전략으로 이어진다. 이는 범죄의 피해를 보상해주는 전략도 아니다. 더 나은 태도가 분명히 있다. 바로 좋은 부모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태도다.


최근에 회복적 정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번달 독서 모임을 위해서 마사 누스바움의 책을 읽고 있다. 책을 읽다 보니, 회복적 정의가 가지지 못한 철학을 마사 누스바움의 이 책에서 가지고 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책의 시작은 저자가 ‘트럼트 대통령 당선’을 확인하며 깊은 절망과 당혹감을 느끼는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잠시 앉아서 그 절망감과 당혹감에 대해 살펴보다가 글을 쓰게 되고, 그 글이 이 책의 모태가 되었다. 마사 누스바움은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고, 이 두려움 때문에 사실을 더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고로 선동에 휘둘리기 쉽고, 결국 누군가를 악한으로 규정하고 그들은 외면하고 처벌하거나 배제한다.라고 말한다. 두려움은 쉽게 분노로 표출되고, 분노는 그 강도가 강하지만, 그 속성은 파괴적이고 정의를 실현할 수도 없다. 트럼프 같은 정치가 혹은 선동가는 자신의 정치력 확보를 위해 이 분노에 불지르고, 쉽게 한 집단을 혐오하게 만든다. 이런 분노에 기반한 혐오는 민주주의를 해친다.  

저자는 간디와 마틴 루터킹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분노가 아닌 힘으로 불의에 항거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세상을 바꾼 사람들. 불의에 항거하지만 불의에 분노로 대처하지 않는 사람. 그게 가능할까.

나처럼 나약한 한 개인은 어떻게 분노에 저항할 수 있을까? 나는 마틴루터킹이 아니다. 분노에 잠식되고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인의 행동에 분개하여 그에 복수를 다짐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대한 안내가 없다면, 개인 수준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이 가능할까.

저자는 좋은 부모가 하는 것처럼,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고 사랑으로 기대하고 희망하라고 한다. 배신이나 실망에 대한 두려움은 있겠지만, 그 두려움을 분노로 표출하지는 않는다고. 좋은 부모가 되기가 쉬운 것도 아니다. 이 책은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안내해줄 수 있을까? 어쩌면 두려워 하긴 하지만, 주기만 하되 되돌려 받으려 하지 않으려는 사랑이 가능한지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