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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아빠로살아가기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어

 

아이들이 가끔 어떤 노래가 꽂히고는 한다. 그리고 우리 딸은 그간 몇 곡에 노래에 꽂혀서 아주 여러번 노래 한 곡을 반복해서 틀고 들었던 적이 있다. 최근에 기억나는 노래는 '귀요미'송이었던 것 같다. 나도 온전한 귀요미송을 드어보지 못했는 데, 딸 덕분에 왜 1 더하기 1은 귀요미가 나온 지 알게 되었다. 알콩달콩 데이트를 하던 커플이 서로 충성을 맹세하자며 귀염 떠는 모습이 노래 전체의 가사였다. 어른들의 '가요'인데, 1 더하기 1은 귀요미로 시작되는 가사 때문에 '동요'로도 불리고 있다.

 

오늘 딸이 꽂힌 노래는 '잘했군 잘했어'였다. 얼마전에 엄마한테 배웠다는데, 분명 처음 들은 건 나에게서 일 것이다. 영감~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전세로 10원을 받았소'까지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1965년에 나온 노래라는데, 장르를 따지자면 대중가요 되겠다. 나는 아주 오래된 민요인 줄 알았는 데 그건 아니었다.

 

영감이니, 마누라니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두 사람이 부르기에 재미가 있다. 딸에게는 가르친 적이 없지만, 아들에게는 한 네 살 때쯤에 가르치고 자주 불러보고는 했다. 역시나 이 노래는 가사를 내 마음대로 바꿔 부르는 게 제 맛이다. 딸은 저 노래를 틀고 율동을 한다. 나도 커피를 한 잔 만들면서 어깨춤을 추고 딸과 흥에 겨웠다. 딸은 영감이라는 말에도 웃고 마누라라는 말에도 웃었다. '병아리를 어떻게 먹어?'라며 웃기도 했다.

 

왜 저 노래가 좋을까. 딸이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좋아하는 이유랑 비슷할까. 나는 왜 저 노래가 좋은가. 부르면 웃을 수 밖에 없는 노래라니 이건 마치 헤르미온느의 마법 같지 않은가. 생각을 거듭해도 왜 좋은지 도무지 이유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영감~', '왜불러' 처럼 부르고,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는 구도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머릿 속에서 노래를 여러번 돌리다 보니 '잘했군 잘했어'가 더 귀에 박힌다. 병아리를 몸보신 하려고 먹고, 오빠 결혼 미천 하라고 황소를 주고, 전세금 받은 돈으로 방앗간 하게 적금 든 것, 장기는 그만두고 태권도 배운다며 장기두러 온 사람을 따돌린 것. 그게 모두 잘 한 짓인지, 왜 저런 가사를 썼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묻고 나서 답을 듣자 마자 연신 '잘했군. 잘했어.' 란다. 이 노래를 따라 불러도 중간에 사연은 바꿔도 '잘했군, 잘했어.' 는 도저히 바꿀 말이 없다. 그걸 바꾸면 다른 노래가 되는 것 같다.

 

누가 나에게 불러줘도 이 음악이 좋지 않을까. 그저 그가 나에게, 내가 그에게 '잘했군, 잘했어.' 속시원하게 말해주게 되니 말이다. 늦잠 자고 일어나도 잘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해도 잘했다, 하라는 일은 미루고 미루다 느즈막이 해도 잘했다. 그렇게 시원하게 칭찬을 듣는 일이 적어서 그럴까.

 

수업 시간 중에 학생들이 답을 하면 이 노래를 부르며 칭찬을 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까지 든다. 나는 칭찬에는 후한 편이 아니다. 스스로에게도 칭찬을 잘 하지는 않는다. 내가 나이가 들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이끌거나, 평가해야 하는 때가 자주 있다. 그럴 때 시원하게 칭찬부터 하지 않는 것 같다. 잘 가르치려면, 적절하게 피드백을 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작은 성취라도 높이 평가해주고 그 사람의 사기를 높여주는 기술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거짓말 같아도, 너무 오버해서 칭찬해주는 것 같아도, 내 이쁜 모습, 잘 하는 모습을 봐주는 사람에게 우리는 충성하게 되지 않나. 내 마음도 몸도 모르게 말이다.

 

딸에게만큼은 칭찬이 헤프다. 나는 딸을 보며 방긋방긋 웃으며 잘 한다, 잘 한다 그렇게 말하며 오늘 저녁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