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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일기 쓰지 못하는 날

매일 하나의 글을 블로그에 올리다 보면, 하루 종일 오늘은 뭐에 대해 써볼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먹이를 찾는 사냥꾼처럼, 고기를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기다린다. 그렇게 무언가를 낚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날도 있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그냥 쓰자니, 나에 대한 것이 아닌 것을 솔직하게 쓰기가 어렵다. 그러려면 또르르 글을 써야 하겠다는 마음이 움츠러 든다.

일기 쓰기 딱 좋은 날

아들이 1, 2학년 때, 숙제로 나오는 일기를 쓰기 힘들어 할 때, 책을 한 권 아들에게 사다준 적이 있다. 그 책의 제목은 ‘일기 쓰기 딱 좋은 날’ 이었다. 토끼 두 마리였던 것 같은데, 아무튼 둘은 일기가 쓰기 싫었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어떤 일이 생긴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그 일에 대해 일기를 쓰게 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은 없지만, 뜻깊은 일을 하며 보낸 날은 쉽게 맞이할 수가 없다. 매일 아침에는 혼자 앉아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생각한다. 지난 메시지도 뒤져보고, 수첩도 다시 읽어본다. 필요한 것을 복사하고, 얼른 해치워야 하는 일은 포스트잇에 써두기도 한다. 그리고 하루 동안 포스트잇에 적힌 일을 다 못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도 예상치 못한 일들만 실컷 하는 때가 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그래도 학생을 일대일로 대면하는 일이라면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아버지가 어제 코로나 검사를 받아서 자가진단에 유증상이라고 표시한 학생, 아토피가 심해진 학생, 머리가 아픈 학생. 조례시간 종례시간 함께 외쳐볼 우리 반 구호를 정했다. 학년 교무실에 쓰려고 새로 구입한 커피 드립퍼를 처음 쓰면서 옆 선생님에게 가르쳐 드렸다. 지나가며 학생들에게 인사하고, 또 인사하는 중에 안부를 묻는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한 번에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다. 급식 지도를 위해 방송을 하고, 교실에 남아 밥을 안 먹는 학생은 없는 지 살핀다. 와중에 조퇴한 학생은 네이스에 기록하고, 학부모와도 통화한다.

와중에 힘들었던 것은 점점 시작되는 여름. 학교 안의 에어컨은 가동은 되는데, 온도는 26도에 고정되어 있다. KF94를 끼고 수업을 하면, 마스크 안에 땀이 찬다. 호흡은 곤란하니, 한 호흡에 많은 말을 뱉어내고 있다. 학생들도 덥지만, 나는 더 덥다. 작년에는 코로나 상황에 창문을 열고 에어컨을 켜라고 했는데, 그때는 전기세 걱정 따위는 안 하던 때였다. 올해는 어떨까. 작년에는 호흡 곤란 등의 이유로 수업 시간도 45분 정도로 조정되었는데, 올해는 학교 자율에 맡기다 보니, 50분 풀이다. 교실에서 알아서 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일까.

학생들의 수행평가를 4시간에 걸쳐서 하고 있는데, 6월 말 시험전까지 학생들이 오는 시간이 너무 적다. 되도록 등교했을 때 수행평가를 진행하려니 내 마음은 급하다. 아침에 앉아서 날짜를 따져보니 수행평가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시험 범위 나가는 게 어렵다. 다 어려운데, 그렇다고 일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다.

해야 할 일의 이유가 충분하다면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되도록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학교에서는 거의 쉬는 시간 없이 일한다. 오늘은 7시 30분에 출근했다. 커피 내리는 시간 두 번이면 20분, 점심먹는 시간 20분. 연강을 마치고 잠시 앉아서 숨고르는 시간 10분. 열심히 페달을 젖듯 일을 해도, 제자리인 것 같은 때가 많다.

오늘 같은 날은 일기쓰지 못하는 날이다. 무슨 일을 했는 지 기억도 잘 나지 않고, 그 일을 관찰할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전거 출퇴근이라도 하면, 자전거 타는 동안 생각이라도 정리를 할 수 있을텐데. 수리를 맡긴 자전거는 빨라야 내일 저녁에 찾을 수가 있다. 일단 내일 저녁까지는 확실히 덜 정리된 상태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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