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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넋 놓은 비질과 맥심 아이스커피

맥심 아이스

올 여름, 아니 올 봄 첫 맥심 아이스 게시다. 책상에 앉아 있느라, 한낮에 건물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는 나는 한낮의 더위를 비켜가고 있다. 3시,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시간, 오늘 예정된 행사를 하나 마치고 약간은 느긋한 마음으로, 그래서 약간은 멍한 기분으로 아이스 커피를 한 잔 탔다. 드립커피만을 마시는 편이지만, 당분이 가끔 당기는 편이다. 씹을 게 있으면 좋겠지만, 씹을 것을 찾지 못해 마시기로만 한다. 휴게실에 들어온 제빙기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골무처럼 생긴 얼음을 넣어 밖으로 나간다. 운동장에 뛰는 아이들이 없으니, 학교에서 의외로 조용한 곳은 운동장을 바라보는 스탠드다. 호로록 마셔버릴 수도 있지만, 일부러 시간을 깔고 앉아 있는다. 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별 생각하지 않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 하나를 알고 있다. 비질을 하는 것이다. 군생활을 할 때, 해군작전사령부를 청소하는 소대에 배치되었던 적이 있다. 주도로 라고 불렀는데, 입구에서부터 직진도로가 아주 길게 이어졌다. 도로 양 옆으로는 한아름은 거뜬히 넘는 건강하고 키큰 벚꽃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나의 임무는 떨어진 나뭇잎을 비질로 쓸어 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짝을 지어서 뒤로 걸으며 비질을 한다. 고개를 들어 보면, 쓸고 온 자리에 잎들이 또 즐비하다. 그래도 싸리비로 비질을 하다 보면, 정리된 도로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마음이 정리된다. 군생활 초반이라 군대 안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따위가 걱정이었을텐데도,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비질하는 시간이 좋았다. 군생활 내내 그 부대에 있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음악을 들으며 비질을 하고, 팟캐스트(그 당시에 팟캐스트 따위는 없었지만)를 들으며 비질을 하고.. 그때 그런 시간을 가졌더라면 지금은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혹은 멍 잘 때리는 사람. 

학교에 도착하면, 컴퓨터 폴더를 열고, 일을 널어놓고, 그와 함께 이런저런 종이도 쌓아 간다. 벌여놓은 것들을 채 마무리 하기 전에 퇴근할 시간이 되어 버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혼자 잘 하고 있나 질문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다. 교장이 되어 학교를 떠나신 교감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렇게 일을 배우고 승진하고 하는거다. 라고. 글쎄. 아직 모르겠다. 일을 배우는 게 무엇인지. 승진하면 뭐가 달라지는 지. 수업하고 학생들과 잘 지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겠지만, 충분히 좋지는 않았던가 싶기도 하다.

과거는 늘 좋았던 것처럼 추억되고, 그래서 현재가 늘 고통을 당한다. 미래는 몰라서 불안하고, 과거는 알아서 낭만적이다. 현재는 모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서 방황한다. 흔들림과 떨림, 불안과 초조. 그런 현재의 상태를 어떻게든 _괜찮음_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힘, 혹은 끌어내리는 힘. 그게 삶의 묘미다. 

물론 나에게는 요령이 하나 있다. 아침, 저녁,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것. 도저히 숨을 헐떡일 만큼 빠르게 자전거를 타지 않으니 운동이 별스럽게 되는 것은 아니겠다. 하지만, 적어도 비질을 하던 그 순간처럼, 나는 느긋하고, 정리되고, 반듯한 마음이 된다. 물론, 요즘처럼 하루살이가 많은 날에는 그들에게 방해 받기도 한다. 혹여나 눈에 들어가지는 않을까 싶어서. 쓰러지지 않으려고 균형을 잡고, 균형을 잡아야 앞으로 나아간다. 

커피를 다 마시고, 미지근한 물에 컵을 씻어 건조기 안에 넣는다. 다시 자리에 앉아서 벌여놓은 일을 정리한다. 폭설 중에 눈을 치우는 것처럼, 한 치 앞까지 허옇다. 이게 현재의 모습이다. 강이 흔들리지 않을 때는 얼어 있을 때 뿐이다. 살아있다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요즘 굉장히 살아 있다.

내일아, 내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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