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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관련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 '나'다운 교사 되기

학생보며 웃는 나 

 

나는 집에서는 아빠와 남편으로 역할하고, 학교에서는 교사이자 동료의 역할을 수행한다. 각 역할에 따라 내 모습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다. 아빠로서의 나는 우리 집에서 '농담', '웃긴 짓', '체력', '방귀'를 담당하고 있다. 남편으로서의 나는 아내의 고민과 이야기 들어주기라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내가 하루를 보내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깨어 있는 시간 8시간 정도를 제외하고 거의 반 정도는 학교에서 보낸다. 나는 교사로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낸다. 어떤 교사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하루에 답을 구하기는 너무 먼 질문이지만, 지금 나와 만나는 학생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면 하루하루 실천으로 답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교실과 학생을 완전히 통제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일단 무겁다. 어떤 교사든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밸런스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교실은 대화의 공간이지만, 대화를 여는 사람은 교사다. 고로 교사는 저돌적으로 대화의 포문을 열어, 팔을 괴고 있는 학생들을 대화를 끌어들여야 한다. 그럴 수 있으면 좋다고 나는 생각하고, 그게 잘 안될 때마다 사실 괴로워한다. 

나는 어떤 역할을 하든, 내가 나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에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돼지고기가 수육이 되든, 돈까스가 되든, 국밥이 되든 돼지고기는 돼지고기다. 내가 아빠가 되든, 남편이 되든, 교사가 되든 나는 나다. 하지만 맛있는 나물이란 게 생야채의 특징을 심심하게 잘 살려내는 데 있는 것처럼, 괜찮은 사람은 본연의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생각한다. 

교무실에서는 유쾌발랄하다가 교실에 들어가면 바늘로 찔러도 어디 한 군데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이상하다. 아,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리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인식에 큰 차이가 없을 때, 나는 피로가 덜 하다. 

내가 만약 나를 '다정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정의한다면, 시종일관 그런 태도로 어떤 역할이든 수행하는 게 좋다. 그러고 싶은데, 물론 그러지 못할 때 나는 괴로워한다. 윤동주 시인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괴로워한다. 

나는 스스로를 '다정한' 편인 사람이라 정의한다. 집에서도 그렇고, 교실에서도 그랬으면 좋겠다. 빵을 사러 갔다가 만난 빵집 점원에게도 나는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야 가면을 쓸 일이 적고, 그 가면 사이의 괴리가 적어 가면을 벗고 쓰는 데 힘이 덜 든다. 

'다정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뚝뚝해도 되고, 좀 무서워도 되겠다. 하지만 나는 다정하면 좋겠다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타인의 사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표정과 말에 영향을 받는다. 내 마음과 사정에 따라 다른 사람의 언행을 곱게 해석하기도 하고, 고깝게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정한 태도는 그게 위선임을 이미 확인한 바 있지 않은 바에야 아니꼽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나는 다른 사람도 나에게 다정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들은 나를 모르고 나의 기분과 사정을 알지 못한다. 함부로 내 기분을 진단하거나,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지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고 싶은 기분이었구나. 이제야 생각한다. 정말 다정하고 싶어해서 그런 게 아닐 수도 있구나 이렇게 글을 쓰다가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다정한 태도를 받으려니, 먼저 베풀기로 결심한다.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내가 베푼다고 그대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 간의 밀고 당기는 행위란 그 계산이 참으로 어렵다. 우리는 서로를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왜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사실 거의 모른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