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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자전거길 담배!빵

자전거 콕핏

매일 아침, 자전거로 페달을 젖어 들이마시는 공기는 상쾌하다. 공기를 가르며 바람을 일으키는 일은 즐겁다. 자전거 전용도로이지만, 보행자가 걷고 있는 건 이제 참을만하다. 물론, 두 사람이 길을 모두 막고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고 걸으면 상당히 방해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어쨌든 사고가 난다면 자전거를 탄 나는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운동하는 물체이므로, 보행자를 먼저 배려 해야 한다. 쏜 살은 아니어도, 잠자리처럼 씽씽 달려가고 싶지만, 보행자 덕분에 브레이크를 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그런데 자전거로 달리는 거리에서 맡게 되는 담배 냄새만은 참을 수가 없다. 어제 아침이었다. 본격적인 자전거 도로로 접어드는 데 담배 냄새가 난다. 바로 앞에는 사람이 없었는 데 냄새가 난다. 코는 구멍 두 개가 붙어 있으면서도 냄새가 어디서 나는 지 귀신같이 찾아낸다. 담배 냄새는 만성 비염을 갖고 있는 나의 코도 각성시킨다. 조금 더 앞으로 가니 한 사람이 내 앞을 이미 지나갔다. 오른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왼손에는 담배를 지고 있다. 연기가 난다.

"아저씨, 담배를 여기서 그렇게 피면 어떻게 합니까?"
"뭐요?"
"자전거 타는 길에서 담배를 피면 어떻게 하냐고요?"
"허"

나보다 한 20살 많을까. 그러니 아저씨라 불렀다. 그 사람이 말한 "허"는 무슨 말일까. 어쩌면 아무도 없는 아침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뒤에서 사람이 아무도 달려오지 않을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는 늘 누군가 다닐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이다. 그게 공공장소의 특징이다. 내 의지나 예상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곳. 그러니 그곳에서는 개인의 자유는 오로지 다른 사람의 자유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능하다. 차를 몰면서 두 차에 걸쳐서 운전을 해서는 안되고, 국립공원 땅에 내 화분을 심고 키울 수는 없다. 자전거 도로에서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잡아 놓고 따지고 싶지만, 역시나 그건 힘이 많이 드는 일이다. 페달을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나처럼 한 마디 하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그 행동이 나아질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제대로 나이 드는 게 쉽지 않다. 내가 모든 기초질서를 지키고, 모든 공중도덕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다. 차가 없는 길에서 무단횡단을 한 적도 있다. 내가 어기는 것은 괜찮고,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나보다 더 나쁜 놈만 나쁜 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야 정의가 어디에서 생길 수 있을까.

누군가를 비판하기 이전에 나를 돌아보는 건 좋지만, 아무 잘못 없는 자만이 담배피는 인간에게 침을 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지구, 한국, 진주라는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이고, 각자의 행동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의 행동을 통제하는 바, 우리는 하나의 유기체와 닮아 있다. 바닷속에서 작은 물고기는 무리 지어 다닌다. 한 마리 리더가 있는 게 아닌데, 그 움직임은 한 마리의 살아있는 짐승과 같다. 한 마리의 물고기는 자기 주변에 있는 다른 물고기의 움직임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물고기와 너무 가까워지면 거리를 두고, 너무 멀어지며 거리를 좁히는 방식. 그런 방식으로 수 백 마리의 물고기가 거대한 한 마리 짐승처럼 움직인다.

인간은 거리만 두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밀집하는 게 아니라, 문화를 사이에 두고 밀집하여 산다. 상호간의 가까움(사귐)과 멀어짐(갈등, 긴장)은 희미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공유하고 있는 상식에 근거한다. 상식의 경계는 모호하나 분명 경계가 있다. 한 덩어리의 물고기가 어디까지 그 형태의 경계를 가지는 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물고기 무리와 그 무리의 밖은 구분된다. 우리는 서로의 상식에의 차이를 말이나 글로 전달한다. 서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말이나 글을 통해 서로의 상식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나는 어쩌면 자전거를 세우고, 아저씨와 대면하고, 담배를 꺼달라고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당시의 생각이지만) 사진으로 찍어 증거를 남겼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런 갈등이 없으려면, 그냥 아무 말 않고 지나가면 좋겠지만, 불편함이 싫어서 피하다 보면, 타인은 무엇이 되는 행동이고, 무엇이 아닌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수 있다. 아니, 아마도 "공공장소에서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에 대한 인식이 약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 인식이 더 나빠질 수가 있다.

나는 굉장히 용감하거나, 얼굴만 보면 사람들이 겸손해질만큼 먹히는 얼굴을 갖고 있지도 않다. 동물의 세계로서의 인간세상에서는 키가 190 정도 되고, 몸무게가 100킬로 정도가 되면 말에 정말 힘이 실리기도 하는데, 나는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아, 어쩜 몸무게를 늘리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김정은처럼?) 하지만, "말하기 불편함"을 참을 수밖에 없다. 담배 냄새를 참는 게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남을 비판할 자격이라는 걸 우리는 받지 못했고, 자격을 따지기 시작하면 법에만 기댈 수 있을 뿐이다. 법 이전에 우리는 인류의 상식이라는 몸둥이를 가지고 있다. 건전한 비판은 어떤 대상에게서든 나올 수 있다. 고로 비판할 자격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비판하자. 우리는 정당하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