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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외면일기

엄마는 잘 살았어

첫째와 나

 


어버이날에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학생 시절 쓴 편지라는 것도 결국 그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줘서 고맙다는 정도이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을 하는 순간은 그저 쓰기 싫거나 귀찮거나, 써야 할 대상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 보지 못해서가 아닌가. 엄마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면서도 나는 엄마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나마 쓰던 ‘그저 그런’ 편지를 쓰는 일도 없었다. 주중에 모자란 잠을 주말에 몰아 자는 것처럼, 그간 엄마에게 못했던 말을 한 번에 모아서 할 수 있을까? 편지는 언제든 보낼 수 있지만, 엄마가 영원히 내 편지를 기다릴 수 없다. 


탁탁 탁탁. 탁탁 탁탁. 엄마가 도마를 칼로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소리가 들리는가 싶으면 곧 냄새도 났다. 기름을 넉넉히 두른 감자채 볶음, 미더덕과 애호박이 들어간 된장찌개. 간이 잘 맞는 계란찜, 감칠맛 나는 미역줄기. 엄마는 늘 나보다 먼저 깨어 있고, 나보다 늦게 잠드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엄마는 얼마나 많은 일을 했던 것일까. 새벽에 우리 삼 형제 먹을 밥을 해놓고, 짜증 많은 동생 머리까지 땋고 묶고 출근을 하고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와서 저녁을 차려 먹이고 빨래를 하고 빨래를 개고 다음 날의 반찬을 준비하면서, 엄마는 어떻게 우리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를 더 생각하게 된다. 반찬 투정하는 아이를 보면서, 양말을 신고서 이상하다며 징징대는 아이를 보면서, 수학 문제 풀다가 머리를 뜯으려고 하는 아이를 보면서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는 어떻게 내게, 우리에게 짜증을 내지 않았던 것일까. 엄마의 무서운 표정을 기억해낼 수도 없다. 엄마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같다. 나는 엄마의 화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누군가를 너무나 미워하는 표정도 본 적이 없다. 나에게 무서운 표정을 한 적도 없다. 엄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왜 그런 엄마가 내게 당연했을까? 도저히 ‘당연히 그러한’ 아빠가 되지 못하고, 아이에게 짜증내고 무서운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면서 나는 한 번도 당연했던 적 없었던 엄마를 생각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만으로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며 먹을 것을 챙기고, 어질러진 것은 치우는 게 과연 얼마나 가능할까. 


천둥 벌거숭이에서 반항기의 소년이 되고, 결혼하여 집을 나와 살게 되기까지 엄마는 나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품에 끼고 옆에 두고 싶었을 게 분명한데 엄마는 천천히 나를 잘 놔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아이를 키우는 데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분명 유용하겠지만, 결국 아이를 관찰하고 아이의 삶을 읽고 아이를 천천히 품에서 떠나보낼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 결국 혼자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게 부모의 일 아닌가. 그런 점에서 엄마는 정말 잘했다. 엄마에게 고맙다. 찾으면 늘 곁에 있었고, 찾지 않아도 먼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내 목소리에 ‘감기 걸린 게 아니냐’ 걱정을 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꽃을 가꾸는 사람처럼, 해가 뜨고 비가 오면 멀리서 햇볕을 받고 비를 머금도록 두면서도 바람이 너무 불면 옆에 딱 붙어와 서서 안부를 묻는 정원사다. 우리 엄마는. 


엄마는 내 아이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내가 참아주는 것보다 더 참아주고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주려고 한다. 아이의 버릇없음이나 실수를 보는 눈은 없는 것 같다. 아이의 성장은 좌충우돌의 과정인데, 나처럼 미숙한 부모는 그 좌충우돌에 우왕좌왕 할 때가 있다. 잘못이 더 눈에 잘 들어올 때도 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의 실수와 잘못은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이쁘다 사랑한다 하는 표정이다. 


엄마는 죽네 마네 부부싸움을 심하게 한 다음 날에도 우리에게 짜증을 내거나 한 적이 없다. 엄마는 늘 그런 것처럼 밥을 차리고, 잊고 가는 것은 없는 지 우리 가방을 챙겨주었다. 나는 엄마가 가엾고 엄마가 불쌍한 적이 있었지만, 그만큼 고마웠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 끼니를 걱정하고 내 하루를 먼저 챙겨주는 사람이 엄마라서 고마웠다. 내 기분이 별로면 아이에게도 퉁명스러워지는 나를 보면서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가 할 수 있었던 것들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딱 엄마만큼이라도 할 수 있다면.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 하지만 이 말을 엄마들의 위대함을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있다. 엄마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위대하다. 그러니 모든 어머니가 위대할 수 있다. 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 내 엄마에게 고맙다. 엄마는 자기 방식으로는 그 어떤 엄마보다도 위대하다. ‘엄마 다움’이라는 것을 비교할 필요가 없지만, ‘내 엄마라서 좋다’라고 말하려면 결국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엄마가 내 엄마라서 좋다.’라고 말해야 한다. 엄마는 잘 살았다. 그 삶의 과정에 내가 아직은 ‘이만큼 뿐인 어른’이라 미안하다. 엄마만큼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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