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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서평 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페이스북을 통해 새로운 책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이 늘었다. (그만큼 페이스북=인터넷의 등식이 이미 완전히 정착된 게 아닌가 싶다. 허허. 나는 왜 블로그에 이 글을 올리고 있는가) 책에 대한 취향이나 독서 이력이나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분들이 추천하는 책은 반드시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몇 장을 뒤적이다 어떤 책은 먼저 읽고 어떤 책은 뒤로 밀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그다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정말 재미있는 나의 책'을 발견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샐러드에 당근을 숨겨 놓듯, 나의 독서에도 즐기지 않으나 필요한 책을 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마요네즈며, 사과며, 딸기 덕에 '사라다' 먹기가 수월하다. 

'당신이 옳다'는 사라다 속 과일 같은 책은 아니었지만, 쉬지 않고 읽고 싶은 책이었다. 읽다가 고민하고 읽다가 공감하고, 읽다가 내 옛 기억과 현재의 어려움을 떠올리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읽어냈고 그다음 공부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공감은 내게 늘 어려웠고, 나 말고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학교라는 공간에서 다들 학생들에게 공감하며 사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보다는 나아지기는 했지만, '공감해야 한다.' 라는 선언은 내가 따라가기에는 힘들었다. 오로지 내가 애정을 주고 학생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되 그 학생의 인생에 이정표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책을 읽고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과 이야기 나누려고 애쓰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연수 따위에서 듣는 적극적 경청이나 공감은 참 어려웠다. 교사에게 학교는 너무나 많은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하는 공간이다. 아침 조례에 들어가서 학생들 무엇부터 살펴야 할지, 수업 들어가면서 자료 준비며, 수업을 잘 따라오지 않거나 따라오기를 포기한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 조퇴하고자 찾아오는 여러 학생들을 일일이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지. 적어도 25명 정도의 눈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부담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공감이라니. 학교 생활에 별 문제가 없어도 학창시절 학생들은 자기 안에 끌어 오르는 질문과 불만으로도 고민이 깊다. 그 학생들 하나하나에 시간을 내는 것도 어렵지만, 공감은 어려웠다. 이 책은 '공감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할지 분명히 하고 있다. 먼저, 나와 타인의 경계를 정확히 세우고, 그 사람의 마음에 대해 질문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는 끊임없이 질문하라. 판단하거나 조언하거나 충고하거나 비판하지 말라. 마음에 거리낌 없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다. 아래는 책을 읽으며 밑줄 그었던 부분과 거기에 덧붙인 내 생각이다. 


적정 심리학, ‘자기’, 묻기 


나와 내 옆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소박한 심리학을 나는 ‘적정 심리학’이라 이름 붙였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나에게 공감하는 방법은 늘 탐구해 오지 않았나. 같은 학급 친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나는 고심했고, ‘내가 보기에는’ 이유 없이 생떼를 쓰는 아이를 보며 어떻게 다가갈까 고민을 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인정하려니 내 감정은 알아봐 주는 이 없는 것 같아, 울 자리가 없어 떠도는 강아지 같은 기분이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적정’ 기술을 가르쳐 준다. 기술이라 부르기 어렵지만, ‘배워서 가능한 공감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행패를 부리던 노인 중 한 명과 얘기를 나누게 됐다. 나는 그 소란에 대해서 묻지 않고 “고향이 어디세요?”물었다........... 소동에 관한 얘기 그 자체만으로는 소동에 관한 진짜 얘기를 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정확한 한 지점도 그랜드 피아노처럼 분명히 존재한다. 그걸 알면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 지점이 바로 한 개별적 존재로서 그 사람의 고유한 ‘자기’다. 


한 사람이 고유한 ‘자기’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마음’인가. 그 마음에 접근하려면, 우선 그 행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그저 “왜 그랬니?” 물어보는 것이 보통의 방법일텐데, 그 보통의 방법은 대개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유를 묻는 말은 그저 뒤따라 오는 질책이나 판단 혹은 평가의 전주곡이라 경험하지 않았나. 지각한 학생에게 “왜 지각했어?”라고 질문하며 한참 답을 기다린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이게 지금 답을 하라는 질문인가?’하는 표정으로 봤다. 그래도 그 아이가 늦을 때마다 그 질문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아이의 마음에 대해 묻지는 못했다. 정말 지각한 이유, 그래서 어그러지는 학교에서의 아침을 궁금해했기 때문에 그 아이와 관계가 어그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지 않았나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에게 닿는 질문은 결국 연습이 필요할텐데, 그러려면 정말 내 마음에도 여유가 있어야 하겠다. 바쁘지 않아야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 전체가 나를 향해 돌진하는 자살특공대는 아니라는 생각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있으면서도 낌새조차 내보이지 않고 소리 없이 스러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라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 하나가 예상치 않게 ‘심리적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나도 ‘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질문을 생각하자마자 내 마음은 강에서 호수로 바뀐다. 요동치다가 잠잠해진다. 요동치는 보트 위에서 주변의 경관을 파악하기 힘들겠지.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내 마음의 주변을 둘러보고, 그게 어떠한지 말로 나타내려고 해 본다. 듣는 사람이 있다면 부끄러워 말하지 못할까?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그 질문을 해준 사람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 것 같다. 


“지금 네 마음이 어떤거니?” “네 고통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거니?” 만약 그의 대답이 없어도, 그가 대답을 피하거나 못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존재에 주목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나는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믿고 공감해주는 사람인가? 아니다, 우선 나는 나 자신을 아끼고 공감하는가.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쉽게 규정하지 말라’라는 문장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저자가 책에서 밝힌 것처럼 게으른 접근이다. 나는 나라는 사람을 ‘게으른 사람’, ‘꾸준하지 못한 사람’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그러니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하고, 무엇이든 꾸준히 해야 한다고 채근하기도 했다. 나는 믿고 아끼는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건강한 공감을 위해서 우선 자신과 다른 사람의 경계를 세우고, 자신이 아파하는 부분에 귀를 기울이라는 저자의 말에 손이 무릎으로 간다. 


어떤 관계에서든 납득할 수 없는 심리적 갑을 관계가 일방적이고 극단적으로 계속된다면 이런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이 더 건강하다. 우선 내 건강성을 지켜야만 나중을 기약할 수도 있다. 


“그래도 계속 만나야 하는 사이인데 그런 상사와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묻는다면 다시 말할 것이다. 질문이 잘못됐다. 상사를 상수로 놓고 나만 변수로 취급하는 불평등한 인식의 구도 안에서 내가 제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얼마나 오래 우리는 ‘저’를 변수로 두었던가. ‘제가 잘 해야이죠’, ‘제가 맞춰보겠습니다.’ 인간이 모두 변수라면 서로에게 조응해나갈 수 있다. 하지만,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사람과 상황’을 상수로 놓으면 나는 그에 맞춰갈 수밖에 없고 나는 그만큼 나를 잃게 된다. 상수와 변수라는 비유가 마음에 든다. 나를 ‘상수’로 취급하고 인생에서 나를 ‘갑’으로 설정한다면, 그저 독불장군이 될 뿐이겠지만, 나는 변수로만 취급하면 내가 사라진다. 그러지 말자. 


궁금해야 질문이 나온다. 궁금하려면 내가 내린 진단과 판단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틈이 있어야 한다. 

내가 아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공감이 아닌가. 공감이다. “나는 미처 몰랐지만 너는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하고 아이의 그 마음을 받아안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의 존재 전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공감이다. 

엄마가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마음 없이 여유 있게 내 존재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이의 입장에서 더할 수 없이 안전하고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