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따위는 당연한 삶, 새해를 맞는 올바른 자세
시해를 보며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어제 2023년도 마무리 하는 글을 혼자 써보면서 나는 나를 칭찬할 방법을 찾고 있다. 나를 칭찬하기 보다는 지난 일에 대한 반성*으로 나 자신을 주눅들 게 한 적이 많았다. 새해가 되면 설레이기는 하지만, 이내 *그렇다고 올 해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하고 나에게 나부터 시비를 걸 때가 있다.
설레는 마음은 걱정되는 마음과 거의 같다. 해보지 않은 일을 맡게 되었을 때 그렇다. 내가 바라는 대로 무언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설레임은, 내가 하기 때문에 일이 틀어질 것 같은 기분과 마주 손 잡고 나타난다. 설레임이나 걱정과는 별게로 결국 일이 되게 하려면 나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이때 걱정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험공부를 잘 하려면, 시험이 되기 전에 적당히 긴장해야 하고 시험이 다가와도 심장이 나대는 걸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일이란 게 그렇다.
분명 올해에는 또 새로운 일을 하게 될 것이라 내 마음은 설레임반, 걱정반을 담아두고 어떤 기분이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될 지 흔들흔들 할 것이다. 교사에게 새해보다는 새학년도가 더 강력한 자극이고 더 분명한 시작이다. 새학년도가 다가오면 긴장감도 높아지리라.
나는 매번 실패하지 않을 뿐더러 고만고만한 능력으로 이제껏 잘 견뎌왔다. 인생은 늘 균형잡기로 스스로를 외줄타는 사람으로 생각할 지 모른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하지만, 삶은 외줄이 아니다. 국민학교 시절 모래밭 가장자리에 폐타이어가 박혀 있었다. 친구들은 혼자서 혹은 친구의 손을 잡고 모래밭에 떨어지지 않고 타이어를 따라 한 바퀴 돌기를 연습하고는 했다. 삶은 모래팥 옆 타이어 다리를 건너는 것 같다. 잘못해서 떨어져도 나락까지는 가지 않는다. (범죄 등등은 논외로 하자.)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은 내가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날 놀릴 준비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인생에서 늘 서사의 중심은 나지만, 우주에서 나는 티끌 같다. 실컷 실패해도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실패를 겁낼 이유가 없다. (아, 뭐 거창하게 실패해본 적도 없다.)
오늘 새로산 책 중에 위근우 작가가 쓴 책을 읽는데, 대략 '고만고만한 재능으로 아등바등 살다보니 글쓰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저자의 글이 와닿았다. 교사로, 아빠로, 남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약간의 재능이 내게 있었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스스로는 나만의 경향성을 생각하고 느끼면서 하루를 한 달을 일년을 보내왔다. 별 탈 없이 먹고 사는 것 또한 그러한 삶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실수하고 실패한다고 해도, 그건 자연스럽다. 한나 아렌트는 한 인간의 탄생과 함께 시작이 가능하다고 했다. 내가 태어남으로써 모든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열렸다. 그런 점에서 늘 내 서사를 나 중심으로 가져가도 나쁠 게 없다. 한 해의 시작을 멋지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마디마디 분명한 삶을 기획하고 있다. 훌륭히 잘 해내고 있다. 오늘 실수하더라도 내일은 웃으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다.